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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언준

申彦俊

1904. 11. 8 ~ 1938.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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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신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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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평원(平原)중국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평원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상해청년동맹
  • · 화동한국유학생연합회
  • · 남경한인학우회
  • · 흥사단원동임시위원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87)

관련 사건

  • · 만보산사건
  • · 윤봉길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87) 1904년 11월 8일 평안남도 평원군(平原郡) 숙천면(肅川面) 미남리(嵋南里)에서 신정균(申貞均)과 송씨(宋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호는 은암(隱岩)이다. 부인 조성덕(趙聖德)과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다. 어려서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1918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五山學校)에 입학해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1919년 3월 31일 오산학교의 교사와 학생들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1923년 중국으로 건너가 항저우(杭州)의 영문전수학교를 수료하였다. 1924년부터 1927년까지 우송(吳淞)의 국립정치대학(國立政治大學) 법률과에서 수학하다가 항저우의 동오대학(東吳大學)으로 옮겨 법률과를 졸업하였다.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결렬된 뒤 1924년 3월 10일 상하이(上海)에서 윤자영(尹滋瑛)·조덕진(趙德津)·최충신(崔忠信) 등 진보적 청년들과 상해청년동맹회(上海靑年同盟會)를 발기하였다. 상해청년동맹회의 목적은 “일반 남녀에게 혁명정신을 고취한 단결된 행동을 훈련하여 민족적 독립을 완성함”에 두었다. 이와 함께 1924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에서 운영하던 상하이 인성학교(仁成學校)의 교사로 독립운동가와 교민 자녀들의 민족교육을 담당하였다. 1926년 7월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한 홍진(洪震)이 ‘이당치국’(以黨治國)을 표방하며 민족유일당 건설운동을 주창하자, 이에 부응하여 학생운동단체도 통합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상해한인학우회(上海韓人學友會)가 출범하였다. 10월 23일 상해한인학우회 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상해한인학우회는 서무부(庶務部)·사교부(社交部)·지육부(智育部)·재무부(財務部)·운동부(運動部) 등의 부서로 이루어졌고, 지육부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안창호(安昌浩)의 권유로 1927년 12월 7일 흥사단(興士團) 원동위원부(遠東委員部)에 입단(단원번호 제220호)하였다. 상하이 하비로(霞飛路) 선종로(善鍾路) 태평촌(泰平村)에서 안창호와 함께 기거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상하이 『중앙일보(中央日報)』 논설위원과 상하이 『세계신문(世界新聞)』 아주(亞洲)부장 등으로 근무하면서 국제열강의 동향과 동아시아 정책을 분석·보도하였고, 중국 언론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아 임시정부와 한국 교민들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국내에서 발간되던 『신동아(新東亞)』, 『신가정(新家庭)』, 『동광(東光)』, 『혜성(慧星)』, 『조선지광(朝鮮之光)』, 『신인간(新人間)』 등의 잡지에 식민지 생활에 대한 자각과 투쟁을 촉구하고, 조국 독립과 민족 해방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는 논설을 기고하였다. 1929년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상하이·난징(南京)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동아시아 정세와 열강들의 동향을 보도하고,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상황을 국내외에 전파하였다. 1930년 6월 7일 개최된 상해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 의사회에서 윤기섭(尹琦燮)의 후임으로 인성학교 학감에 취임하였다. 1931년 7월 2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현(長春縣) 만보산(萬寶山) 지역에서 수로 문제로 한·중 양국 농민들이 충돌한 ‘만보산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일제가 한·중 민족 간에 반목과 대립을 유도하여 만주 침략의 빌미로 이용하려는 음모라는 것을 밝혀내 상하이에서 「만보산 문제와 중국측 방침」이라는 전문을 『동아일보』에 타전하였다. 이 보도를 통해 중국 국민당 정부 외교부가 일본 정부에 항의하고, 국제연맹에 호소하여 정당한 해결을 도모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국내에 알렸다. 또한 난징 발 특전으로 상하이 한인 각 단체들의 의견을 통해 국내에서 중국인에 대한 보복적 행동을 자제할 것을 송신함으로써 일제의 간계에 부화뇌동하지 말도록 호소하였다. 더불어 난징에 체류하고 있었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외교부장 왕정옌(王正延)을 방문하여, 일제의 한·중 양민족 이간 책동에 말려들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이와 함께 중국 정부가 이주 한인들의 보호에 힘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친분이 있는 중국 언론계 인사들과 신문 기자들을 초청하여 ‘만보산사건’의 내막을 폭로하였고, 이를 통해 중국사회의 반한(反韓)여론을 항일로 전환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두 의사의 사진과 활동 상황을 중국 신문에 배포하여 한국 독립운동을 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안창호의 뒤를 이어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이끌던 송병조(宋秉祚)를 도와 흥사단 활동을 지속하였다. 원동위원부 월례회에 참석하여 정치·시사·국내 사정 등에 관해 강연하였다. 1935년 5월 30일 일제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았으나 병세가 위급하여 풀려났다. 일제 감시 속에 투병하다가 1938년 1월 20일 숙천면 관동리(舘東里)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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