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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완

申尙玩

1891. 5. 6 ~ 1951.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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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신상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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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수원(水原)임시정부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수원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유심회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대한승려연합회
  • · 대한독립애국단
  • · 철원애국단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관련 사건

  • · 1919년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5) 1891년 5월 6일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안룡면(安龍面) 안녕리(安寧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신장균(申章均)· 전장춘(田章春)이다. 용주사(龍珠寺) 출신 승려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만세운동 직후에는 서울과 중국 상하이(上海) 등지를 오가면서 불교계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용주사의 평안북도 지역 말사를 총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1915년 평북 철산군(鐵山郡)의 국청사(國淸寺) 주지, 1916년에는 평북 의주군(義州郡) 영장사(靈藏寺)·천왕사(天王寺)·나한사(羅漢寺)의 주지 겸무(兼務)로 있었다. 평북 지역의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 중앙학림(中央學林)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날인 2월 28일 밤 한용운(韓龍雲)이 자신을 따르던 중앙학림의 승려 10여 명을 유심사(唯心社)로 초청할 때 중앙학림 재학생 모임인 유심회(唯心會)의 회장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한용운으로부터 만세운동 적극 참가, 선언서 배부, 지방 사찰로 만세운동의 파급 등을 당부 받았다. 그 직후 범어사포교당(서울, 종로)으로 가서 구체적인 거사 실행을 논의하였다. 이때 불교계 총궐기를 유도하고, 운동 후의 지도 연락기관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전국불교도 독립운동 본부를 정하고, 총참모로 선임되었다. 이 같은 결정을 하고 각자의 임무를 받고 헤어졌다. 1919년 만세운동 당일, 파고다 공원에서의 만세시위, 독립선언서 배부를 하고 자택에 설치한 전국불교도 독립운동 본부를 이끌었다. 중앙학림 학인이었던 백성욱(白性郁)과 중앙고보에 재학 중인 학승 박민오(朴玟悟)를 참모로 두었다. 1919년 3월 7일, 일제의 검거를 피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4월 중순 경 중국에서 돌아와 군자금을 모금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4월 말 경, 김법린(金法麟)·백성욱·김대용(金大鎔) 등과 함께 다시 상하이로 갔다. 상하이에서 안창호(安昌浩)·이동휘(李東輝)를 만났고, 김법린을 국내로 보내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나서게 하였고, 백초월(白初月)과 김봉신(金奉信)으로부터 송금받은 자금을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더불어 상하이에서 불교의 위상을 고양시키기 위해 국내 고승을 초청하였다. 이런 구도에서 불교 30본산위원장을 역임한 이회광(李晦光)의 망명을 유도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김포광(金包光)이 불교 대표로 상하이에 왔다. 이때 상하이에서 대한승려연합회(大韓僧侶聯合會)를 결성하고, 「승려선언서(僧侶宣言書)」의 제작과 배포, 의용승군제(義勇僧軍制) 결성에 관여하였다. 12명의 가명으로 나온 「승려선언서」는 불교의 독립운동, 호국 불교의 이념을 표출시킨 역사적인 문건이었다. 더불어 임시정부가 국제연맹에 제출하기 위해 간행한 『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에 7장의 종교 탄압 부분의 「총독정치의 대불교책(對佛敎策)」을 서술하였다. 1919년 8월, 강원도 지역의 독립운동에 매진하라는 임시정부의 명을 받고, 철원으로 들어와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과 함께 독립선언의 준비에 참여하였다. 11월에는 여운형의 일본 도쿄(東京)행의 수행원 역할을 맡았다. 1920년 초, 상하이에서 안창호와 임시 의용승군제 실시를 검토하고 국내로 돌아와 전국 사찰을 돌면서 그 실행에 나섰다. 동시에 석왕사(釋王寺)·은해사(銀海寺)·범어사(梵魚寺) 등지에서 독립자금의 모집 활동도 하였다. 그러나 1920년 4월 6일,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 사건에 관련되어 일제에 붙잡혔다. 그 해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21년 3월 1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1923년 5월 풀려난 후 1923년 11월 19~21일에 걸쳐 『조선일보』에 불교 교단, 승려들을 비판하는 내용의 「조선불교 당국 제씨에게」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이후에는 별다른 활동 없이 은둔하였고, 1942년 4월 용주사 주지 선거 시에 후보자로 거론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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