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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공제

辛公濟

1899. 3. 15 ~ 1969.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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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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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정주(定州)임시정부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정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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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한국독립당
  • · 조선민족혁명당
  • · 조선혁명당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99년 3월 15일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에서 태어났다. 호는 인산(仁山)이고, 이명으로 이광제(李光濟)를 사용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참가 후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에서 근무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채모집원으로도 활동하였다고 하나 공적 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1923년 일본 정보문서에 난징(南京)에서 활동하는 한인 인사 가운데 이름이 나오는데 이때부터 난징의 중국학생회 등과 연락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후반 중국 중앙대학(中央大學)에 입학한 후, 난징 한인사회와 임시정부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30년 상하이에서 안창호(安昌浩)·김구(金九)·이동녕(李東寧) 등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었다.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를 옹호 유지하기 위해 결성한 독립운동정당이다. 1933년 1월 15일 한국독립당 대회에서 간부진 개편이 있었는데, 이때 김두봉(金枓奉)·김구·강창제(姜昌濟)·박창세(朴昌世) 등과 함께 이사로 선임되었다. 아울러 ‘난징지부(南京支部)’ 대표를 맡아 조직 확대에 힘을 쏟았다. 1934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의정활동에도 참여하였다. 그해 1월 2일 전장(鎭江)에서 열린 제2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최동오(崔東旿)·문일민(文逸民)·양명진(楊明鎭)·김규식(金奎植)·유동열(柳東說)과 함께 ‘중국령(中國領) 대표’ 로 의원에 선출되었고, 이어서 박창세, 문일민과 같이 상임위원에 선임되었다. 임시의정원 상임위원회는 3인으로 구성되었는데, 「임시의정원법」에 규정된 일반적인 상임위원회와는 다른 권한을 가졌다. 이때의 상임위원회는 전체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리지 못할 때도 국무위원의 사직을 수리하고 국가의 회계검사와 예산외의 지출 동의 등 임시정부의 업무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였다. 1934년 10월에 열린 제27회 임시의정원에서도 상임위원에 선출되어 이듬해 10월 제28회 회의가 열릴 때까지 조완구(趙琬九)·문일민과 함께 상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사이 1931년 봄 난징에서 한인들을 규합하여 난징대한교민회(南京大韓僑民會)를 조직하고, 9월 20일 제1회 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발표한 장정에 “난징 거주 한교(韓僑)의 단결을 도모하고 한국독립운동의 사명을 이행하며, 교민의 자치 실현을 기한다”라고 하여 교민간의 친목 도모만이 아닌 독립운동에 적극 동참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이후 1932년 상하이사변 등의 영향으로 한인들이 난징으로 모여들고 각종 혁명단체들이 조직되자, 1934년 봄 김두봉과 함께 교민회를 해소하고, 그 해 12월에 새로 남경한족회(南京韓族會)를 결성하였다. 한편 1931년 7월 중앙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재학 중이던 1930년 1월 17일 국민정부 내정부(內政部)의 허가를 받아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학교 측에 제출한 문건에서, 중국 국적 취득 동기에 대해 “한국인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하였고, 일본제국주의와 양립할 수 없어서 망명하여 중국에 와서 중앙대학에서 수학하였다. 만약에 장래 혁명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귀국하여 일왕의 신민(臣民)이 되지 않으려는 생각에서”라고 기술되어 있다. 졸업 후에는 난징 소재 중국 정부기관에서 근무하며, 독립운동을 함께하였다. 한인독립운동 지원 업무에 참여하였던 중국 인사의 회고에 따르면 중앙대학 졸업 후 주자화(朱家驊) 아래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당시 중앙대학 총장이 주자화였는데, 주자화는 1931년 12월 중앙대학 총장에서 물러난 이후 1940년대 항일전쟁 기간 중국국민당 중앙조직부장과 비서장을 지내며 임시정부를 비롯한 한인 독립운동진영에 대한 관리와 지원 업무의 중심 인물이었다. 주자화와의 ‘사제관계’ 인연으로 1934년경 난징에 소재한 국민정부 교통부 총무사(總務司)에 근무하면서 한인독립운동의 정황과 특정 사건 등에 대한 경과와 자신의 견해를 주자화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 1931년 9월 18일 시작된 만주사변을 배경으로 의열단과 한국독립당 등 관내지역 한인독립운동 진영은 중국 측과의 한·중 연대 형성을 도모하며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독립당 내부에서는 새롭게 결성될 ‘통일동맹’ 참여 여부를 두고 찬반으로 의견이 나뉘었다. 이때 참여파에 속하여 1935년 6월 20일 최석순·김두봉·양기탁·조소앙·박창세와 같이 한국독립당 대표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각혁명단체대표대회에 참석하여 그해 7월 5일 민족혁명당을 결성하였다. 이때 15인으로 구성된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으며 조사부장을 맡았다. 이어 민족혁명당은 그 해 8월에 난징·상하이·항저우 지방을 통할하는 화중지부(華中支部)를 난징에 설치하였는데, 김홍서(金弘敍)·한일래(韓一來)·김학규(金學奎)와 화중지부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6년 7월 1일자로 간행된 『민족혁명』 제3호에 「혁명적 요소와 기본적 정책」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글에서 독립운동진영의 단결을 호소하고 민족혁명당이 혁명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당원들에게 정치훈련·도덕훈련·기술훈련·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전국의 민중에게까지 확대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애당·애국·충용·희생·책임감·의무관념·민중운동·파괴운동·건설방략 등은 이들 네 가지의 훈련에서 산출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민족혁명당은 단일대당 결성이라는 목표를 갖고 창당했지만, 출범 초기부터 당의 주도권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창당 석달만에 조소앙을 비롯한 한국독립당 출신인사 4명이 탈당하였다. 이어 1937년 4월에 이청천 등과 민족혁명당을 탈당하여 새롭게 조선혁명당을 창당하고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이때부터 김구의 한국국민당, 조소앙의 재건 한국독립당, 이청천의 조선혁명당은 민족주의 진영 3당의 통합에 진력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이 함락되고, 임시정부 인사들이 머물던 창사도 위태롭게 되자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임시 수도인 충칭(重慶)으로 이동을 결정하였다. 1939년 하반기 충칭에 도착하여 임시정부 외교위원으로 중국국민당 등 중국 측과 소통·연대 활동을 전개하면서, 임시정부와 한인독립운동단체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같은 해 10월 3일 개원한 제3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다시 의원에 선출되어 의정 활동을 이어갔다. 1942년 10월 25일 개회한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익 진영의 인사들을 포함하여 새롭게 23명의 의원들이 선출되어 최대의 성황을 이루었다. 임시의정원은 4개의 상임위원회를 운영하기로 결정하고 각 정파를 망라하여 각 분과별로 5인의 상임위원을 선출하였다. 이때 조소앙·이연호·신영삼과 함께 상임위원회 제2과(내무·외무·교육·실업)에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0월 28일에는 최동오를 비롯한 27인의 의원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최단기간 내에 중·미·영·소 등 연합국 정부에 정식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임시정부 승인에 관한 건’ 제안에 참여하였다. 1942년 12월에는 민족혁명당이 주재하는 충칭에 있는 각 군소정당의 통합회의에 참가하여, 조선민족당해외전권위원회 대표 자격으로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한국독립당혁신동지회·조선민족당해외전권위원회 등 군소정당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키로 결정하였고, 통합 후 김인철·한지성·성주식·왕통·손두환·김붕준과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45년 2월 7일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운영 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는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을 결성하였다. 신한민주당에는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중간에서 조정 역할을 맡겠다”라는 명분과 “각지의 한국 혁명동지들이 참가한 대표대회를 거행하여, 임시의정원 및 임시정부를 개조할 것”을 표방하며 두 당에서 이탈한 유동열·손두환·문일민·심영삼·강창제 등이 참여하였다. 이때 손두환·신영삼과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6월 8일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는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아울러 비서부장을 맡았다. 일본의 패망이 가시화된 시점인 1945년 8월 13일에는 김원봉(金元鳳)·손두환(孫斗煥)·유동열(柳東說)·김상덕(金尙德) 등 20명의 의원들과 함께 “임시의정원의 권한을 장차 성립될 전국 통일적 임시의회에 돌려주기로 하고, 임시의정원의 직권을 정지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의 의안 제안에 참여하였다. 이어 1945년 8월 23일 마지막으로 개최한 제39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손두환을 비롯한 16명의 의원들이 제안한 “국내 및 국제적 정세에 비추어 현 내각은 즉시 총사직하고 간수내각(看守內閣)을 조직하여 시의(時宜)에 필요한 일체 시급한 사무를 처리토록” 하자는 의안에 이름을 올렸다. 이는 광복 후 국내로 돌아가 새로운 의회와 정부 수립의 길을 열어 놓자는 주장이었다. 1946년 1월 4일에는 ‘충칭거주 한국독립운동자대회 대표’의 일원으로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5년간 신탁통치 결정 사실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문건을 장제스(蔣介石) 주석에게 발송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한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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