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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몽규

宋夢奎

1917. 9. 28 ~ 1945.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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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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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간도(間島)일본방면

지도 위치

광역 지역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중국 간도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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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반
  • · 재교토조선인학생 민족주의 그룹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관련 사건

  • · 재교토조선인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5) 1917년 9월 28일 중국 간도성(間島省) 옌지현(延吉縣) 지신촌(智新村) 명동둔(明東屯)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은 함경북도(咸鏡北道) 경흥군(慶興郡) 웅기읍(雄基邑) 웅상동(雄尙洞)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호는 고문해(高文海)이며, 아명은 송한범(宋韓範)이다. 이명은 왕위지(王偉志)·꿈별 등이고,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송촌몽규(宋村夢奎)를 사용하였다. 양친 모두 기독교 신자로 부친 송창희(宋昌羲)는 명동학교에서 우리말과 양잠을 가르쳤고, 모친 윤신영(尹信永)은 윤동주(尹東柱)의 큰고모이다. 1925년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에 입학하여 윤동주·문익환(文益煥)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명동학교는 1908년 개교 이래 기독교를 바탕으로 항일 민족교육을 실시하여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간도 지역의 대표적인 기독교계 민족학교였다. 1931년 3월 졸업 후 대랍자(大拉子) 소재 중국인 소학교에 1년 정도 다니고, 1932년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하였다. 은진중학교는 캐나다 선교부에서 설립한 기독교계 민족학교였다. 중학교 재학 중이던 1934년 말 『동아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 콩트 부문에 송한범이란 아명으로, 아내의 ‘숟가락’을 소재로 생활고에 시달리던 부부의 에피소드를 다룬 「술가락」이란 작품을 응모하여 당선되었다. 1935년 3월 졸업을 한 해 앞둔 학교를 그만두고 4월경 김구(金九) 산하 중국 중앙군관학교(中央軍官學校) 뤄양분교(洛陽分校) 한인반(班) 제2기생으로 들어가고자 난징(南京)으로 건너갔다. 이 한인반은 김구가 한국인 청년들의 군사훈련을 위해 1934년 2월 교육기간 1년 과정으로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 내에 설치·운영한 것인데, 1935년 4월 당시에는 중국 국민당의 재정지원이 끊어져 운영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구가 중앙군관학교에 입교시킬 청년들의 대기시설로서 별도 마련한 학생훈련소(예비훈련소, 몽장훈련소(蒙藏訓練所)에 들어갔다. 훈련소에 있을 때 동료들의 글을 모아 잡지 『신민(新民)』을 편집·간행하였다. 입교 예정시기였던 그 해 9월이 지나도록 일제 측의 압력으로 인해 입교할 수 없게 되자 대부분 훈련소를 떠나는 가운데 11월경 산둥성(山東省) 지난(濟南)에서 독립운동을 이끌던 은진중학교 선배 이웅(李雄, 임병웅(林炳雄))의 단체에 합류하여 독립운동을 하고자 하였다. 이웅은 남경정부 요인 암살과 비행장 폭파계획 등을 추진하였으나, 1935년 1월 일제 밀정이라는 논란에 휩싸여 사망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4월 10일 지난 주재 일본 영사관 경찰에게 붙잡혔으며, 6월 27일 본적지인 웅기경찰서로 압송되었다. 8월 29일 청진(淸津)검사국에 송치되었다가, 9월 14일 거주제한 조건으로 풀려났다. 1937년 4월 간도 용정가(龍井街)의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 4학년으로 편입하여 다시 공부하였고, 1938년 4월 민족적 계몽운동에 힘쓰고자 서울의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현 연세대학교) 문과(文科) 별과(別科)에 입학하였다. 문학 활동도 계속하여 1938년에는 시 ‘밤’을 『조선일보』 9월 12일자에 발표하였다. 1940년 6월 잡지 『삼천리(三千里)』에 「연희전문(延禧專門) 문과학생(文科學生)의 『문화감상(文化鑑賞)』(記)」라는 제목으로 총 10명의 연희전문 재학생이 철학과 종교·문학·음악·영화 등 각 분야의 대표작을 실제 읽거나 듣거나 본 작품에 대해 쓴 감상문이 특집으로 실렸다. 이 중 11편의 문학작품과 4편의 영화에 대한 감상문을 게재하였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이른바 동화정책 강화로 인해 각 학교의 한국어 수업이 폐지되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받자, 한국 문학 및 한국의 고유문화의 말살과 한국 민족의 멸망을 우려하며 민족 문화를 유지·향상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교내 동급생 윤동주·백인준(白仁俊)·강처중(姜處重) 등과 함께 조선문학동호회 문우회(文友會)를 만들고 문예부장과 간사로서 동인지 『문우(文友)』를 편집·간행하였다. ‘꿈별’이라는 필명으로 「하늘과 더부러」라는 제목의 시를 게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시체제 강화로 동호회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문우』는 1941년 6월까지만 발행되었다. 1941년 12월 연희전문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한 후 일본 교토(京都)로 건너가 1942년 4월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문학부(文學部) 서양사학과(西洋史學科) 선과생(選科生)으로 입학하였다. 독립을 위해 민족 문화를 연구하려면 문학과 역사를 더욱 깊이 이해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유학을 결정한 것이다. 유학생활을 하며 “독립 국가를 반드시 건설해야 하고, 독립을 위해서는 조선인의 대중의식을 앙양시키는 데 힘써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민족의식이 더욱 커지며 “조선총독부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은 일본이 조선 민족을 회유하고 기만하는 것으로, 조선 민족은 결코 열등 민족이 아니며 조선의 독립은 역사적 필연”이라 인식하게 되었다. “조선민족을 문화적으로 계몽함으로써 민족문화를 지키고 민족의식을 자각하면 독립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태평양전쟁 강화조약 때에는 조선의 독립을 조건으로 내세워야 하며, 일본의 국력이 약화하거나 패전할 시에는 조선인 모두가 합심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1942년 12월 초순경 교토의 하숙집에서 제3고등학교 유학생 고희욱(高熙旭)과 독립운동을 논하였고, 1943년 4월 한국어를 쓰지 못하는 현실, 만주국의 일본인과 한인 식량 차별, 조선총독부의 징병제도를 비판하며 징병제 실시를 독립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을 윤동주와 함께 논의하였다. 1943년 4월 하순 교토 시외의 야세(八瀬)유원지에서 윤동주, 릿쿄(立教)대학 유학생 백인준(白仁俊)과 만나 일본 패전 시 한국인 징병제의 독립운동 활용 방안을 모색하자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해 6월 하순 고희욱(高熙旭)·윤동주와 태평양전쟁 종결에는 강화조약이 반드시 필요하니 회의 개최 시 독립 여론을 환기시켜 달성해야 한다며, 인도의 독립운동가 찬드라 보슈(Chandra Bose)와 같은 지도자를 양성하여 일본의 전력이 떨어졌을 때 그와 같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논의를 하였다. 1943년 7월 10일 ‘재교토조선인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윤동주·고희욱과 함께 붙잡혔다. 그 해 4월 17일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후쿠오카(福岡)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던 중, 1945년 3월 7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배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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