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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계백

宋繼白

1896 ~ 1922.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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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송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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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평원(平原)일본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평원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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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
  • · 반도웅변회
  • ·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
  • · 와세다대학 동창회
  • · 조선청년독립단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 · 2
  • · 8독립선언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평안남도 평원군(平原郡)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96년생으로 추정된다. 보성고등보통학교 에서 공부한 후 일본 유학을 떠났다. 와세다대학 법과 예과 를 거쳐, 1917년 차석으로 법과 본과 에 진학하였다. 1915년 유학 중인 민병세(閔丙世)·김재희(金在禧) 등과 함께 반도웅변회(半島雄辯會)를 설립하여, 매달 수차례 회합을 가지고 서로 변론 연습을 하였다.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在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 이하 ‘학우회’)에도 참여하여, 1917년 11월 17일 학우회 주최 웅변회에서 ‘풍기와 사상’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다. 연설을 통해 주색과 영웅주의에 빠져 부패·타락하는 유학생과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사리사욕을 위해 ‘총독정치에 맹종’하는 일부 조선인을 비판하며, ‘조선국가의 책임을 담당’할 학생으로서의 자성을 촉구하였다. 일본의 정치가·교육가·실업가에 ‘아부’하며 그들이 말하는 조선 자치를 받아들이려 하는 조선인이 있음을 지적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 나가야 하며 일본이 말하는 동양평화에 숨겨진 그들의 야심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일제 경찰에게 요시찰인 갑호(要視察人 甲号)로 끊임없이 감시를 당하였다. 1918년 무렵 재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在東京朝鮮基督敎靑年會)에 가입하여 서기로 활약하였고, 재학 중이던 와세다대학 동창회에서는 회계를 맡았다. 1917년 11월의 러시아혁명과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 그리고 재미 한인들의 독립청원운동과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을 호소하려는 동시다발적 움직임에 자극을 받았다. 1918년 말부터 웅변회(10월 5일), 망년회(12월 29일), 동서연합웅변회(12월 30일) 등 각종 회합에서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논의를 거듭하였다. 1919년 1월 6일 학우회 웅변회에서는 최팔용(崔八鏞)·김철수(金喆壽)·김상덕(金尙德)·이종근(李琮根)·최근우(崔謹遇) 등과 함께 연설을 하며, 독립운동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최팔용·이종근·최근우·김상덕·김도연(金度演)·백관수(白寬洙)·서춘(徐椿)·전영택(田榮澤)·윤창석(尹昌錫)과 함께 총 10명의 임시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구체적 방안으로는 일본 제국의회 청원서 제출과 조선 대표자의 파리 파견, 결의문으로 여론 환기, 유학생들의 동맹 휴교 등이 정해졌다. 논의는 7~8일에도 계속되었고, 이후 전영택이 병으로 사임하고 이광수(李光洙)와 김철수가 추가되어 총 11명의 위원이 활동하게 되었다. 이 무렵 조선을 오가며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활자와 비용 마련 등에 관한 구체적 논의와 준비 진행을 맡았다. 1919년 1월말 비밀리에 국내로 파견되어 최린(崔麟)·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송진우(宋鎭禹)·현상윤(玄相允) 등과 논의하였다. 유학생 선배인 정노식(鄭魯湜)을 찾아가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준비상황을 전하였다. 그리고 민족자결주의라는 세계의 이상이 발휘되는 이때 독립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며, 파리강화회의 대표자 파견과 독립청원서 송부, 선언서 발표, 만세운동 전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정노식도 이에 찬성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도쿄의 임시위원들은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민족대회 소집청원서」 및 「독립선언서」, 「결의문」 작성 및 인쇄 준비에 나섰다. 이광수가 기초한 선언서·결의문·청원서가 마련되었고, 인쇄용 활자와 정노식에게 받은 운동자금도 무사히 일본으로 가지고 왔다. 그러나 한글 인쇄활자 문제와 시간 부족으로 인해 한글과 일본어 독립선언서는 등사판으로 준비되었다. 이 선언서에 위 11명의 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2월 8일 유학생 200~300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인 가운데 학우회 총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백관수가 사회자 윤창석의 소개로 등단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김도연이 결의문, 서춘이 청원서를 각각 낭독하여 2·8독립선언의 시작을 알렸다. 낭독에 이어 연설이 이어지자 일제 경찰이 해산 명령을 내렸고, 학생과 경찰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 현장에 없었던 이광수와 최근우를 제외한 9명의 선언서 서명자와 30여 명의 유학생들이 함께 그 자리에서 붙잡혔고, 니시칸다(西神田)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위원이 아닌 참가자들은 다음날 저녁에 풀려났다. 2월 10일 도쿄지방재판소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2월 15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출판법 위반으로 금고(禁錮) 7월 15일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그 해 6월 26일 기각되어 도쿄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0년 초에 풀려났다. 풀려난 후 1920년 11월 재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 이사로 선임되었다. 1921년 3월 24일 고향인 평원군에서 풍기교정대연설회(風紀矯正大演說會) 연사로 참여하였다. 1922년 1월 12일 평원군 영유면(永柔面) 자택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배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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