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홍
宋柄虹1921. 2. 2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삼인단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1993) 1921년 2월 2일 경상남도 울산군(蔚山郡) 언양면(彦陽面) 반송리(盤松里)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우촌홍길(宇村鴻吉)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언양공립보통학교와 울산공립농업실습학교(蔚山農業實習學校)를 졸업하였다. 1938년 4월 수학을 목적으로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갔다. 학비를 벌기 위해 신문배달업에 종사하는 한편, 대학 입학을 위한 예비학교인 겐수학관(硏數學館)에서 수리(數理)를 배웠다. 그러나 가정의 지원 없이 고학만으로는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였다. 이후 도쿄 소재 영사(映寫)기술학교에 입학해 기술을 배웠다. 졸업한 뒤에는 영사교사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일본 유학 당시 일본에 와 있는 동향 친구들과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 같은 울산농업실습학교 출신 손병주(孫炳柱·茂村炳柱)와 함께 자취하였다. 나가사키현(長崎縣) 이시하야(諫早) 농학교에 진학한 동향 출신 친구들과도 자주 연락을 주고 받았다. 그러던 중 1941년 9월 당시 미에현(三重縣) 소재 고등농림학교에 다니고 있던 박근철(朴根澈·光井根澈)의 제안을 받아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박근철은 일찍이 일본인의 한국인 차별과 멸시에 분개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먹고, 이를 추진하던 중이었다. 그는 이시하야농학교 재학 당시 한국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삼인단(三人團)’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30여 명의 회원을 모은 상황이었다. 진학 때문에 미에현으로 이주한 뒤에도 국내와 일본 각지의 동지 획득에 노력해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학교 현장 실습차 도쿄에 온 박근철이 손병주를 만나 자신이 학교에서 겪은 일본인의 폭력행위와 취업 시장에서의 차별대우에 대해 토로할 때 자리에 함께 하였다. 그 자리에서 박근철이 “조선인은 아무리 두뇌가 명석해도 일본인의 부하가 될 수밖에 없다”, “이 현상에서 벗어나려면 독립 말고는 방법이 없다”, “장차 일본이 세계대전에 휘말린다면 종국에는 경제적 파멸이 초래될 것이니 이 시기를 기해 일제히 봉기해야 한다”는 취지를 말하며 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자 이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봉기를 일으킬 적당한 시기가 올 때까지 “조선 동포의 교육과 문화향상에 노력할 것”, “무술을 연마해 유사시에 대비할 것”, “동지들끼리 결속을 굳건히 할 것” 등 이른바 “삼인조(三人組) 정신”을 지키기로 맹세하였다. 또한 평소 생각하고 있던 중일전쟁과 일제의 패망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독립운동 추진에 대한 여러 방안을 논의한 뒤, 향후 긴밀한 연락 하에 이를 실천해 나아갈 것을 결의하였다. 이후 박근철 등과의 ‘삼인단’ 독립운동 준비 활동을 1942년 초까지 이어갔다. 이들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전쟁 상황 등 각자 획득한 정보를 공유하였다. 후배와 친구들에게 접근하여 독립운동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확인한 뒤, 동지로 규합하기도 하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함께 활동하던 동지 일부가 일제 경찰의 감시망에 포착되면서 붙잡혔다. 이때 이른바 치안유지법과 육군형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이후 대구로 끌려가, 일제의 판결이 있을 때까지 약 1년 여 동안 고문과 학대를 받으며 옥고를 겪었다. 1943년 5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고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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