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훈
高光勳1862. 4. 7 ~ 1930. 10. 2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고광순 의진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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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0) 1862년 4월 7일 전라남도 담양(潭陽)에서 태어났다. 본관(本貫)은 장흥(長興)이며, 호(號)는 동강(桐崗)이다. 임진왜란 당시 금산전투(錦山戰鬪)에서 순절한 문관(文官) 출신 의병장 고경명(髙敬命)의 후손이며,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기우만(奇宇萬)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고광순(高光洵)의 동생이다. 고광순은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1906년 최익현(崔益鉉) 의병부대에 합류하려 하였으나 최익현의 패전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07년 1월 24일 전남 창평(昌平, 1914년 담양에 통합) 저산(猪山)의 제각(祭閣)에서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고광순이 의병장으로 추대되고, 부장(副將)은 고제량(高濟亮)이 되었다. 이때 고광수(高光秀)·고광채(高光彩)·윤영기(尹泳淇)·박기덕(朴基德)과 함께 참모(參謀)에 임명되었다. 고광순 의병부대는 1907년 2월부터 9월까지 전북 남원(南原)과 전남 화순(和順) 등지에서 일본인 거주 지역과 순사주재소(巡査駐在所) 등을 공격하다가 9월 17일 구례(求禮) 지리산 연곡사(燕谷寺)로 들어가 의진을 정비하였다. 그러나 10월 17일 본영(本營)에 동료 의병 10여 명과 함께 남아 있을 때 양방향에서 일본군의 야습(夜襲)을 받아 의병장 고광순과 부장 고제량이 전사하였다. 고광순은 일본군과의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그대는 군부(軍簿)를 가지고 가서 후화(後禍)를 끊으라”라고 당부하였다. 의진의 명부를 파기하여 일본군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한 것이다. 이후 고광순의 시신을 수습하여 창평(昌平)에 돌아가 장례를 지내고 흩어졌던 의병들을 다시 규합하였다. 이때 눈물을 흘리며 “나는 들으니 형제의 원수는 나라를 같이 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지금 나는 동지들과 함께 위로는 국가의 수치를 씻고 아래로는 형의 원수를 갚기로 맹서한다”라고 하니 의병들 역시 감동하여 따랐다고 한다. 이후 곡성(谷城) 노티(櫓峙) 전투에서 일본군에 포위되어 체포되었다. 광주 감옥에서 5개월 복역하고 다시 진도(珍島)로 유배된 후 3년 만에 석방되었다. 귀향 후 아들 재춘(在春)을 형 고광순에게 입적시켜 제사를 잇게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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