沈斗燮
斗燮1894. 10. 24 ~ 1975. 5. 3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진주군 읍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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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4년 10월 24일 경상남도 진주군(晋州郡) 진주면(晋州面) 비봉동(飛鳳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8일, 진주군 읍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가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진주군 읍내의 만세운동은 경남 최대 장인 진주시장 장날에 일어났다. 진주군에서 총 9차례 일어났었던 만세시위 중 가장 큰 규모로 치열한 양상을 보였다. 진주군 읍내의 만세시위는 고종의 국상으로 상경한 김재화(金在華) 등 지역 인사들이 서울의 만세운동을 경험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내려오면서 시작되었다. 김재화는 3월 11일 귀향하여 뜻을 같이하는 인사들과 진주 읍내 중심가에서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때 거사 논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며, 이강우(李康雨)·강달영(姜達永)·박진환(朴進煥)·권채근(權采根)·강상호(姜相鎬) 등이 함께하였다. 거사 준비는 계획이 일제 군경에 누설될 것을 우려하여 장소를 바꿔가며 이루어졌다. 거사 준비에 참여한 주도층 인사들이 몇 명씩 나누어 모이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치밀하게 진행되었다. 만세시위 당일 군중들에게 배포할 독립선언서와 교유문(敎喩文)을 김재화가 작성하였고, 시위에 사용할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깃발과 구한국기를 모방한 태극기도 제작하였다. 독립선언서와 교유문은 박진환, 정준교(鄭準敎)와 함께 진주면 천전리(川前里) 산중에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대량 인쇄하였다. 당일 시위 방식도 주도층을 2~3인씩 나누어 진주 시장, 매립지, 법원 지청 앞, 공원 등에서 분산하여 시작하고, 군중들이 모이고 시위의 열기가 고조되면 각자 시위대를 이끌고 군내 중심부에서 합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이강우와 함께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 앞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기로 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이강우와 함께 군중들에게 배포할 독립선언서와 교유문을 소지하고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으로 갔다. 군중들이 많이 모이는 오후 1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우선 군중들을 향해 일반 인민이 ‘독립만세’를 부를 기세를 높이면 독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니, 활발히 ‘독립만세’를 외쳐야 한다는 취지의 열띤 연설을 하였다. 군중들 역시 전국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였다. 이때 이강우와 함께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교유문을 군중들에게 나눠주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이 따라서 만세를 불렀다. 만세를 부르며 시위대를 이끌고 진주 군내 중심가를 행진하였다. 진주시장 장터, 법원 지청 앞, 매립지, 공원 등 각기 분산되어 시작된 만세시위가 군내 중심가에서 하나로 합쳐지면서 시위대는 수천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일제 군경들의 본격적인 진압이 시작되었다. 진압에는 진주경찰서 경찰들에 더하여 진주파견대가 가세하였고, 진주소방대도 출동하였다. 일제 군경은 총검을 휘두르며 무자비한 강제 진압과 동시에 시위 주도자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 작전도 병행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밤늦게까지 적극적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나, 결국 일제 군경에 붙잡혔다. 고문을 동반한 혹독한 조사를 받았고, 결국 기소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같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김재화 등 주도자들 중 가장 중형이었다. 즉각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그 해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존의 형량이 가볍다는 이유로 징역 3년을 받았다. 다시 불복하고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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