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균
申福均1885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2)
관련 사건
- · 평산군 인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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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2) 황해도 평산군(平山郡) 인산면(隣山面) 건천리(乾川里) 출신이다. 1919년 당시 판결문에 35세로, 1885년생으로 추정된다. 1919년 4월 1일 평산군 인산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가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해서 평양, 의주 등에서 일제히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만세운동의 주도자들은 시위의 전국적 확산을 추진하였다. 그 중 천도교계는 각 지역 천도교구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시도하였다. 천도교주 손병희(孫秉熙)의 지시를 받은 이동락(李東洛)은 3월 2일에 평산군으로 귀향하였으나, 일제 헌병대에 의해서 거주 제한에 따른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그러자 이동락은 금천군(金川郡)의 천도교인 강창선(姜昌善)을 통해서 만세시위를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3월 7일 평산읍 장날에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일제 헌병대의 총격으로 사망자가 발생하였지만, 그 다음날에도 평산읍에서는 군민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엄중한 감시로 평산군에서는 3월 말까지 만세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전국적으로 만세시위가 확산되자 평산군 내 각 지역에서 다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월 30일 평산읍의 은담리(隱潭里)와 빙고리(氷庫里)에는 ‘대한국독립만세(大韓國獨立萬歲)’라는 문구가 적힌 전단이 붙었다. 그리고 3월 31일에는 장날을 맞이하여 금암면(金岩面) 한포리(汗浦里)와 인산면(麟山面) 기린리(麒麟里)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인산면 기린리의 만세시위(일명 기린장 시위)는 3월 31일과 4월 1일 이틀에 걸쳐 일어났다. 먼저 3월 31일 오후 1시경 인산면과 상월면(上月面) 주민들과 기독교인 150~600여 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인산면 면서기 서홍균(徐洪均)·엄윤영(嚴允榮)·정학규(鄭學奎)와 화가 김예식(金禮植)·김두우(金斗牛)·서용하(徐用河)·신만균(申萬均)·조봉성(趙鳳成) 등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장터 일대를 행진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 헌병은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1명이 사망하였다. 4월 1일 기린장이 열리는 시장에서 만세시위가 재개되었고, 이때 김두우·이춘봉(李春奉)·신봉균(申鳳均) 등과 함께 40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기린경관주재소로 행진하였고, 기린경관주재소에서 일제의 무력 탄압을 규탄하였다. 이에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서 발포하였고, 현장에서 3명이 사망하였다. 일제 헌병의 발포를 피해서 자택으로 피신하였으나, 이후 인산면 시위를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일제 헌병대에 붙잡혔다. 해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과 소요죄, 상해죄로 징역 4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7월 1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재차 “만국평화화의의 민족자결주의에 의해서 조선이 독립이 되었다는 소식에 기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고 밝히면서, “만세시위의 주도자가 아니기에 4년 선고가 과중하다”고 주장하며 상고하였다. 그러나 1919년 9월 22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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