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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윤

申東潤

1884. 9. 25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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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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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강서(江西)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강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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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11)

관련 사건

  • · 개서읍
  • · 남대문역 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1) 1884년 9월 25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성산면(城山面) 주산리(舟山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평남 용강군(龍岡郡) 지운면(池雲面) 만하리(晩荷里)에 거주하였고 천도교(天道敎) 신자로, 그림 그리는 화가[絵師]를 직업으로 삼아 살고 있었다. 3월 3일 개성군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서울로 올라와 3월 17일 남대문역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다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1919년 3월 1일 무렵부터 개성군 일대에는 독립선언서 수 백 장이 배포되었다. 천도교도인으로 독립을 열망하던 중 개성에서 독립선언서에 천도교주 손병희(孫秉熙) 등이 서명한 것을 확인하고,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3월 3일,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松都面)에서는 개성군 최초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好壽敦女子高等普通學校)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독립가와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하자, 송도고등보통학교(松都高等普通學校) 학생들이 뒤를 이어 대열에 합류하였고, 이어 일반 군중도 참가하여 1,00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만세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한편 같은 날 송도면 남산정(南山町) 일대에서 과자 제조 판매업자인 이형순(李亨淳)의 주도 하에 1,5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행진 과정에서 시위대는 식산은행(殖産銀行) 개성지점의 일장기를 끌어 내렸다. 이 때 군중 사이에서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개성 헌병 분대와 경찰서에 도달하여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부당함과 불만을 성토(聲討)하였으며, 나아가 경찰서에 진입하여 경찰과 투석전(投石戰)을 벌였다. 이어진 3월 4일에도 개성군 읍내 일대에서는 송도고등보통학교 학생과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낮에는 600여 명 가량이 모여 만세를 불렀으며, 밤에는 그 수가 2,000여 명으로 늘어나, 읍내 각 지에서 만세를 부르고 경찰과 투석전을 전개하였다. 이후 개성에서의 만세시위가 주춤해지자 서울로 이동하였다. 3월 17일, 전국 각지의 인파가 모이는 서울 남대문역 3등 대합실(待合室)로 향했다. 이곳에서 군중들을 향해 “각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 없으면 한국의 독립은 기약할 수 없을 것이니 고향에 돌아가서 한국 독립 만세를 절규할 것”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소리 높여 연설하였다. 이를 발견한 헌병 경찰의 제지에 불응하였고, 헌병 경찰이 체포하려하자 한국 독립 만세를 외치며 저항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일제 헌병에게 붙잡혀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4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같은 해 4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도 동일하게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으며,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1919년 5월 22일 고등법원은 상고를 기각하여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0년 4월 28일 형기를 조금 남겨 놓은 시점에 사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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