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송
申東松1870. 3. 26 ~ 1919. 3. 1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영덕군 영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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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870년 3월 26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병곡면(柄谷面) 원황리(遠黃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8~19일 양일 간에 걸쳐 영덕군 영해면(寧海面)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현장에서 일본군에게 희생되었다. 영덕군에는 3월 중순경부터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영해면과 영덕면(盈德面)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병곡면(柄谷面)·지품면(知品面)·창수면(蒼水面) 등지로 확산되었다. 3월 12일 지품면 낙평동(洛坪洞) 교회에서 김세영(金世榮)은 권태원(權泰源)에게 각지의 만세운동 소식과 파리장서운동에 대해 전달하고 정규하(丁奎河)와 함께 영덕읍내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협의하였다. 이에 정규하와 남효직(南孝直) 등은 영해면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기독교도와 양반 등을 규합하였다. 3월 18일 오후 1시 30분경 성내동(城內洞) 시장에서 영해공립보통학교(寧海公立普通學校) 등 학생을 중심으로 구성된 100여 명의 군중이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정규하 등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자 장터에 모인 군중이 호응하며 만세를 부르고 장터 주변을 행진하였다. 2,000여 명으로 증가한 시위 군중은 영해공립심상소학교(寧海公立尋常小學校), 영해우편소, 영해면사무소를 돌며 집기 등을 훼손하였다. 박의락(朴義洛) 등 일부 군중은 영해경찰관주재소로 달려갔다. 일본인 순사부장이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숙사 등 일부를 파괴하였다. 군중은 영덕경찰서에서 급히 파견된 서장 이하 5명 경찰에게서 무기를 빼앗고 경찰서장을 구타하기도 하였다. 경찰이 발검(拔劍)하고 주도자 2명을 체포하고 무기를 회수하여 갔으나 만세운동 기운은 가라앉지 않았다. 만세운동은 다음날인 3월 19일로 이어졌다. 600~700여 명의 군중이 아침부터 치열하게 만세를 부르며 만세운동을 계속하였다. 오전 10~11시경 포항헌병분대에서 분대장 이하 7명이 파견되어 영덕경찰서장 이하 4명을 군중에게서 되찾았으며 오후 4시경에는 보병80연대에서 보병 21명을 자동차로 급히 파견되어 영해면의 경계를 강화하였다. 오후 5시 일제 군경이 공포를 발사해 위협함으로써 군중이 일시 해산하였으나 다시 군경의 탄압에 저항하였다. 이에 일제 군경이 만세운동 군중을 향해 실탄을 발사하였다. 이틀 간의 만세운동으로 영해면 성내동 일대에서는 250여 명이 붙잡혔으며 4명이 사망하고 16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당시 성내동 장터에서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등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제 군경의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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