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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일

宋文一

1856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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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송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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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단천(端川)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단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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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2)

관련 사건

  • · 단천군 북두일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2)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 북두일면(北斗日面) 신덕리(新德里) 출신이다. 1919년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63세로, 1856년생으로 추정된다. 1919년 3월 22일 단천군 북두일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해서 평양(平壤)·안주(安州)·의주(義州)·선천(宣川)·원산(元山)·진남포(鎭南浦)에서 만세운동이 일제히 일어났다.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와 학생대표들은 2월 28일을 전후로 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추진하기 위해 인편을 통해서 독립선언서를 전국 각 지역으로 배포하고 만세시위 소식을 전달하였다. 함경남도 단천의 만세운동은 3월 13일 길주군(吉州郡)으로 찾아온 천태종이 천도교도 권명주(權明周)를 만나면서 준비되었다. 천태종은 권명주에게 독립선언서를 단천군 북두일면 대신리에 거주하는 황희종(簧熙鍾)에게 전달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3월 15일 황희종의 집에 도착한 권명주는 황희종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더불어 길주군의 만세시위 상황을 알려주면서 황희종에게 북두일면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다. 한편 3월 17일 북두일면 용양리(龍陽里)에서 만세시위 움직임이 있었으나, 이를 미리 감지한 대신리 헌병주재소 헌병들이 만세시위가 전개되지 못하도록 사전에 통제하였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1919년 3월 22일 북두일면 대신리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오전 7시 무렵 신덕리에 사는 임용선이 만세시위 참여를 준비중인 천도교도와 주민들에게 “헌병의 해산 명령에 응하지 말고, 군경에 체포당하지 않도록 하되 체포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그를 구출할 것, 신복리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헌병주재소를 습격해서 구금된 인사들을 구조하고 현병이 자신들의 행동을 방해하면 투석전과 몽둥이로 맞서 싸워서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다. 신덕리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북두일면 전체로 확산되고 있었던 오후 무렵 대신리(大新里)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만세시위를 주도한 김성호(金成浩)·이종근(李宗根)과 함께 500~60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이때 시위대와 함께 대신리헌병주재소로 몰려가 함성을 지르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헌병들의 해산 요구를 묵살하고 오히려 헌병과 헌병보조원 6명을 포위하였다. 김성호와 황희청(黃熙淸)이 일제 헌병을 향해 돌을 던져 헌병과 보조원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러자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하였고, 시위대 7명이 사망하고 일부 주민들이 부상을 입었다. 일제 군경에 의해서 단천군 북두일면 대신리 시위를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6월 25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8월에 벌금 30원을 받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8월 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의해서 행동한 것은 범죄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상고하였으나,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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