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수
徐在守1898. 1. 29 ~ 1964. 10. 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동군 임동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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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8년 1월 29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동면(臨東面) 중평동(中坪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21일 중평동 편항시장(鞭巷市場, 챗거리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안동군 임동면 편항시장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연성(柳淵成)은 3월 15일 유동수(柳東洙)·이강욱(李康郁)·유곡란(柳谷蘭) 등과 뜻을 모아 만세시위를 결의하고, 3월 21일 장날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거사 날짜를 정한 주도자들은 임동면을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 각자 맡은 지역의 주민들을 동원하기로 하였다. 중평동 일대는 박재식(朴載植)·박진선(朴晋先)·유곡란이 맡아 주민들을 동원하였다. 이들은 주민들에게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면서 편항시장의 만세운동을 알리고 동참을 제의하였는데, 이러한 권유를 받아들여 만세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거사 당일인 1919년 3월 21일, 마을 주민들과 함께 장터로 향하였다. 장터에는 여러 지역에서 온 장꾼과 주민들로 붐비고 있었으며 그 사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오후 2시 무렵 유연성이 주도자들과 함께 장터 중앙으로 나왔다. 군중 앞에 선 유연성은 왜 만세운동을 해야 하는지 연설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유연성의 선창을 신호로 모인 사람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소리가 장터 곳곳에서 들리자 장꾼과 주민들도 호응하며 만세운동에 동참하였고, 점점 더 많은 군중들의 참여로 만세운동은 열기를 더해갔다. 그러나 그때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출동한 일제 경찰이 군중들을 가로막으며 해산을 시도하였다. 일제 경찰 한 명이 참여자 배태근(裵太根)에게 “왜 치안을 방해하느냐”고 하였고, 배태근은 “우리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은 자유이며 우리가 일본인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다”고 항의하였다. 그러자 일제 경찰이 항의하는 배태근의 뺨을 때리며 체포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이를 보고 있던 군중이 일제 경찰에게 몰려갔고, 분노한 군중을 본 일제 경찰은 그 자리에서 달아나 주재소로 도망쳤다. 이어서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로 향하였으며, 유연성·배태근·유곡란 등이 선두에서 이끌었다. 500여 명의 시위대가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였지만, 일제 경찰이 권총을 쏘며 위협하였다. 격분한 시위대는 돌과 몽둥이로 출입문을 부수고 주재소 안으로 들어갔다. 주재소 벽과 창문 등을 모두 부순 시위대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책상과 의자 등의 기물을 파괴하고 장부와 서류 등도 모두 찢어 창문 밖으로 던졌다. 또한 일제 경찰에게서 빼앗은 권총과 대검, 주재소 안에 있던 탄환 등의 무기도 모두 모아 주재소 뜰에 있는 우물 안에 버렸다. 주재소에서의 격렬한 시위를 끝내고 나서 다른 일부 사람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더 많은 시위대가 오후 5시경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1,500여 명의 시위대가 면사무소 벽과 창문, 가스등을 모두 파괴하였고, 사무소 안의 집기와 문서도 모두 파괴하였다. 시위는 새벽 3시까지 이어진 후 모두 자진 해산하였다. 하지만 일제 경찰은 다음날부터 만세운동 관련자 체포에 나섰고, 결국 이 과정에서 붙잡혔다. 이 일로 1919년 5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 건조물 손괴죄, 가택 침입죄, 상해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그 해 8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었지만, 징역 2년이 그대로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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