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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순채

徐淳彩

1900. 10. 2 ~ 1959.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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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서순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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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광(靈光)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영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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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영광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00년 10월 2일 전라남도 영광군(靈光郡) 영광면(靈光面) 교촌리(校村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3월 영광군 영광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영광군 만세운동은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만세시위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 당시 서울에서 유학하고 있던 학생인 조철현(曺喆鉉)과 유일(柳一) 등은 서울에서 대대적으로 전개된 만세운동을 직접 경험하고는, 이를 고향인 영광군에도 전하고자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였다. 이들은 영광에서 영광보통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이병영(李炳英) 등의 인물과 접촉하여 영광에서의 만세시위를 계획하고자 하였다. 이병영은 이들과 만나기 이전부터 만세운동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자신이 가르치고 있던 영광보통학교 학생들을 규합하여 설득하는 등 영광군 내에서 시위를 일으킬 것을 자체적으로 계획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영광군에서는 3월 14일 영광읍내에서 처음으로 시위가 일어나게 되었다. 3월 14일 만세시위를 주도한 조철현과 이병영 등 주요 인물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시위대는 경찰에 의해 해산당하였다. 그러나 영광군에서 처음으로 점화된 시위의 불길은 점차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다음날인 3월 15일에는 500여 명의 군중이 영광읍내에서 시위에 동참하였는데, 전날의 만세운동에 자극을 받았으며 체포당한 인물을 구출하기 위하여 만세를 외치며 영광경찰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3월 14일과 15일 만세시위에 계속해서 참석하였는데 이때 체포를 피할 수 있었다. 3월 15일 만세시위에서 김준헌(金浚獻)·유두엽(柳斗燁) 등과 함께 시위 도중에 참가하여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고 시위 군중과 함께 행진하였다. 시위대는 영광면 남천리(南川里)를 출발하여 도동리(道東里)·백학리(白鶴里)·무허리(武虛里)를 거쳐 영광경찰서에 당도하였으며, 경찰서 구내로 진입하고자 하였다. 15일의 시위로 인하여 또다시 다수의 사람들이 잡혀갔다. 이후 3월 27일 영광읍내에서 일어난 시위에 더욱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김준헌·유봉기(柳奉基)·조병완(曺秉浣) 등과 함께 조선독립에 뜻을 함께하는 주위 인물을 규합하여 14, 15일의 시위를 계승하여 다시금 만세시위를 일으키고자 계획하였다. 유봉기와 조병완은 유봉기의 집에서 시위 군중에 배포할 유인물을 작성하여 시위 전날 길가에 살포하여 두었다. 시위 당일인 27일에 김준헌·유봉기·조병완 등과 함께 남천리 유(柳) 이발소에 모여 태극기를 제작하였고, 지나가던 학생들에게도 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는 등 시위 계획을 세워 당일 오후 3시에 영광읍에서 시위를 거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경찰의 감시에 시위 계획이 발각되어, 본격적으로 시위를 시작하기 전에 붙잡히고 말았다. 1919년 5월 6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8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다시금 징역 1년(미결구류 일수 중 30일 본형에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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