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원성
方遠成1896. 10. 29 ~ 1924. 4. 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맹호단
- · 국민위원회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관련 사건
- · 국민대표회의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5) 1896년 10월 29일 함경북도 성진군(城津郡) 학남면(鶴南面) 용대리(龍大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방원성(方遠聲·方元)과 방달성(方達成)을 사용하였다. 기독교 신자였다. 1919년 3월까지 일본 효고현(兵庫縣) 고베(神戶) 신학교에 유학하여 1년을 다니다가 국내에서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자퇴하였다. 같은 해 4월 8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용정촌(龍井村)으로 가서 기독교 목사 정재면(鄭載冕)의 집에 잠깐 머물다가 일제 관헌을 피하여 이익찬(李翼燦) 등과 영국인이 경영하는 제창의원(濟昌醫院)에 기거하며 활동하였다. 이 병원에서 독립신문을 배포하고 독립운동가를 숨겨주는 활동을 하였으며, 맹호단(猛虎團) 조직에 참여하였다. 맹호단 단장은 김상호(金商鎬)였으며, 용정촌 국자가(局子街) 두도구(頭道溝) 부근에 본부를 두었다. 명동학교(明東學校)와 정동학교(正東學校) 학생을 비롯하여 간도와 연해주 등으로 온 20세 이상의 청년 십여 명이 단원이었다. 1919년 5월 4일 맹호단의 이름으로 간도 일본총영사관 경찰관, 외무성 경부, 거류민회장 이희덕(李熙悳) 등에게 사직을 요구하는 문서를 발송하였다. 그밖에 일제 기관의 정보를 수집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낼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이어가던 중 일제 관헌에 붙잡혀 1919년 6월 6일부터 향후 3년간 중국재류금지 처분을 받고 함북 회령(會寧)으로 끌려왔다.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과 치안방해, 협박 등으로 제1심 재판을 받고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1919년 12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을 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1920년 1월 1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1921년 7월 부산에서 고베 신학부 학생 신분으로 부산청년회와 동아일보 부산지국의 후원으로 열린 문화선전대강연회에서 ‘새살림의 준비’, ‘행복의 생활’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워싱턴회의에 임시정부가 한국의 독립 문제를 상정하기 위한 안건에 찬성하고, 1921년 11월 5일 일본 도쿄(東京)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이동제(李東濟)·김송은(金松殷)·이흥삼(李興三)·이민철(李敏轍)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응원하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선언서를 배포하고 도쿄에 있는 한인 학생들과 동맹휴교를 단행하였다. 이 선언서를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워싱턴회의에 전달하기 위하여 상하이(上海)로 갔다. 워싱턴회의에서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하자, 1922년 6월 8일 유호청년임시대회(留滬靑年臨時大會)에 참가하여 국민대표회의의 개최를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워싱턴회의 결렬 이후, 임시정부의 재편을 두고 1923년 1월에 열린 국민대표회에 참석하였다. 같은 해 2월 6일 국민대표회의 교육분과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국민대표회의 이후 임시정부의 재편을 놓고 ‘창조파’와 ‘개조파’로 논쟁이 발생하자 ‘창조파’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1924년 2월 국민위원회(國民委員會)를 조직하고자 하였다. 국민위원회국민위원 10명과 후보위원 10명을 선출하였는데, 이때 후보위원으로 당선되었다. 활동을 이어가던 중, 1924년 4월 3일 심장병으로 상하이 홍십자의원(紅十字醫院)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중 같은 해 6월 3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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