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손진형

孫晋衡

1871. 7. 20 ~ 1919. 7. 14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손진형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경북 경주(慶州)임시정부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경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이강년 의병부대
  • · 한성정부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을사늑약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71년 7월 20일 경상북도 경주군(慶州郡) 강동면(江東面) 오금리(吾琴里)에서 손최수(孫最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천정과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1905년 이승희(李承熙)의 을사늑약 파기 상소 투쟁에 참여하였고, 이어 1908년 이강년(李康年)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좌종사부(坐從事部)에서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1911년 (음)10월 충청북도 옥천(沃川)에서 이용규(李容珪)·장남기(張南基) 등은 1912년 3월 15일 서울 화개동(花開洞) 김철수(金哲洙) 집에서 장남기를 만나서 일본인을 격퇴해 국권을 회복한다는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어 같은 해 3월 28일 상주군(尙州郡) 동관음동(東觀音洞) 장남기 집에서 동지들을 다시 만나 거사를 준비하였다. 4월 14일 장남기로부터 음력 3월 안에 일본 격퇴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이를 기원하고자 필요한 제사 비용 100원을 모금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에 1912년 4월 15일 충청남도 진잠군(鎭岑郡)에서 권호(權浩)를 만나 자금을 요청하였고, 권호는 남태진(南台鎭)·이창희(李昌熙) 등에게도 자금 모금을 권유하였다. 4월 16일 권호·남태진·이창희 등이 70원을 조달하였고, 4월 17일 남태진이 이를 장남기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제사에 참여했던 동지가 붙잡히면서 계획이 발각되었다. 1912년 5월 22일 계획에 참여했던 관련자들과 함께 붙잡혀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지만 같은 해 9월 28일 면소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일제는 해당 거사 계획을 마술을 이용한 사기로 규정하였다. 이는 장남기를 사람들을 현혹한 ‘마술사’로 파악했기 때문인데 장남기는 마술사가 아니라 참의를 지냈던 유학자로, 언급한 제사 의식은 유학자들이 의병 봉기 전에 행했던 회맹(會盟) 의식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14년, 44세의 나이로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1915년 국내로 돌아와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2년 일본인 격퇴 거사 계획을 함께 준비했던 동지 이용규가 관련되었던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와 연계되어 독립의군부의 군자금 모집에 참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독립의군부는 대규모 의병전쟁을 준비하고자 1912년 11월 전라남북도 지방에 조직된 항일무장투쟁단체였다. 1916년 (음)7월 이용규는 이만직(李晩稙)·윤병일(尹炳日) 등과 이내수(李來修)의 집에서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하였고, 이에 필요한 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자금 제공을 약속했던 박동신(朴東臣)의 밀고로 1917년 4월 이용규 등이 논산에서 붙잡힌 후 관련자들과 함께 붙잡혔다. 이 사건으로 울릉도에서 1년 동안 거주제한을 당했다가 1918년 8월 19일 풀려났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에는 국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이때 국내 한성정부(漢城政府)의 평정관(評政官) 18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한성정부 수립 과정에서 개최된 4월 2일 13도 대표자 대회에 참석한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1919년 4월 12일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같은 해 4월 22일 제2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였다. 제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임시정부 관제를 차장제에서 위원제로 변경하였는데, 이때 교통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교통부는 정보 수집과 연락 등 통신 업무를 담당하면서 재정 자금의 수합 업무도 수행하는 기관이었다. 한편 파리장서운동을 추진했던 김창숙(金昌淑)이 1919년 4월 27일 장서 전달을 위해 상하이에 도착하자 이동녕(李東寧)·조성환(曺成煥)·이시영(李始榮)·신규식(申圭植)·조완구(趙琬九)·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김창숙을 만나서 파리로 갈 계획을 논의하였다. 김창숙이 임시정부에 남아서 활동할 때 주로 대중국 외교업무를 같이 진행하였다. 1919년 6월 중순 김창숙과 함께 광동군정부 중의원의원 링유에(凌鉞)을 만났다. 링유에와 수차례 회동을 가졌고 이후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중국과의 협력방안을 모색하였다. 1919년 7월 초 링유에의 주선으로 프랑스 조계 쑨원(孫文) 저택에서 쑨원을 만났다. 임시정부와 광둥(廣東) 호법정부(護法政府)가 협력을 시도하는 첫 만남이었다. 쑨원과 회담을 통해서 임시정부와 중화혁명당의 광동군정부의 공식회담이 논의되었다. 하지만 콜레라에 걸려서 1919년 (음)7월 14일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임동현⋮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