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기
白貞基1896. 1. 19 ~ 1934. 6.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 · 육삼정 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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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2) 1896년 (음)1월 19일 전라북도 부안군(扶安郡) 부안읍(扶安邑) 신운리(新雲里) 운기(運氣)마을 149번지에서 아버지 백남일(白南一)과 어머니 파평 윤씨(坡坪 尹氏) 사이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水原)이고, 호는 구파(鷗波·九波)이다. 1908년 아버지를 여의고 조병열(趙秉烈)의 딸 조팔락(趙八洛)과 결혼하면서 처가가 있던 정읍군(井邑郡) 영원면(永元面) 은선리(隱仙里)으로 이주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무정부주의 운동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유생 고응중(高應中)을 비롯한 동지들과 함께 영주정사의 학감 고인주(高麟柱)가 발의한 망국제에 참여하여 국권 회복을 다짐하였다. 1914년 인근 농가에서 목화 씨앗을 짓밟고 물레를 파괴한 일제 경찰을 구타한 사건 때문에 피신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농촌의 피폐함과 망국의 설움을 통탄하며 일제와 결사 항쟁할 것을 결심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일제에 대항하여 직접 행동을 취할 것을 결심하며 독립운동을 위한 동지 규합과 자금 모집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나시현(山梨縣) 갑부(甲府)에서 일하면서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사상을 공부하였다. 1923년 8월 박승규(朴升奎) 일행과 일왕 살해를 목적으로 사전 답사차 도쿄(東京)로 갔으나 9월 일어난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그해 말 귀국하였다. 1924년 4월에는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가 정현섭(鄭賢燮)·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와 함께 활동하였다. 이회영(李會英)·유자명(柳子明) 등과 함께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재일한인들을 학살했던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고 이론적 기반을 가진 사상적 토대 위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하고자 아나키스트 항일운동 단체인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 이하 무련)을 결성하였다. ‘무련’은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진영을 모두 비판하며 민족주의 진영 내 파벌주의적 경향을 지양할 것을 표방하였다. 무련에서 활동 중 아나키즘 이론 선전을 위한 단체의 기관지로 『정의공보(正義公報)』를 발행에 참여하여 독립운동 이론 정립을 위해 힘썼다. 무련이 자금난으로 단체 유지가 어렵게 되자 동지 정현섭과 함께 푸젠성(福建省)으로 건너갔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지속되자 동지들과 중국 각지로 흩어져서 활동하기로 결심하였고, 이을규·이정규·정현섭과 함께 1924년 10월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영국인 철공장 노동자로 생활하였다. 이때 철공자의 부당한 노동자 대우에 항의하며 철공장 파업을 주도하였다. 1925년 겨울 이후 정현섭 등 동지들과 톈진(天津)과 베이징을 오가며 생활하였다. 1927년 국내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연합한 항일단체인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자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도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을 조직하였다. 이때 이 단체의 상해연맹 단원으로 가입하였고, 단체의 방침에 따라 일제에 대항해 의열투쟁을 전개하는 직접행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이어 1928년 9월 난징(南京)에서 조직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도 가입하며 해당 단체 기관지 『동방(東方)』의 편집위원에 합류하였다. 이후 1930년 하이린(海林)에 도착해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김종진(金宗鎭)을 도와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에서 아나키스트 계몽활동과 한국인 동포사회 생활 지도에 힘썼다. 1930년 4월 20일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이 결집하여 일제에 직접행동을 전개를 대대적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목적 하에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였다. 1931년 9월 이래로 정현섭 등 만주에서 함께 활동하던 동지들이 남화연맹에 가입할 때 같이 합류하였다. 이어 1931년 11월 이회영·정현섭 등 한국인 동지들과 중국인 왕야차오(王亞樵)·화쥔스(華均實), 일본인 아나키스트 사노 이치로(佐野一郞) 등과 적의 기관 파괴, 요인 암살, 친일분자 제거를 실행하는 비밀결사 행동대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였다. 흑색공포단은 한국·중국·일본을 아우르는 국제조직적인 단체로 조직되었고 그 안에서 조선인부를 담당하였다. 이수현(李守鉉)·전리방(田理芳)·김지강(金之江)·이달(李達)·엄향순(嚴享淳)·양여주(揚汝舟)·이강훈(李康勳) 등을 흑색공포단에 가입시켰다. 1932년 4월 29일에는 상하이 훙커우(虹口) 공원에서 열린 천장절(天長節) 기념식 행사에서 시라카와白川 등 일본군부 요인들에 폭탄을 던지고자 준비했으나 당일 윤봉길(尹奉吉)이 먼저 폭탄을 던져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같은 해 12월, 이규서(李圭瑞)와 연충렬(延忠烈)을 이회영이 일제 경찰에 붙잡히는 데 일조한 밀고자로 지목하여 정현섭을 비롯한 동지 몇 명과 함께 남상입달학원(南翔立達學園)에서 처단하였다. 1933년 3월, 흑색공포단 동지 원심창(元心昌)으로부터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가 중국 국민당정부를 상대로 만주를 포기하도록 종용한다는 소식을 듣자 동지들과 함께 아리요시 일본공사 처단을 계획하였다. 아리요시가 3월 17일 밤, 일본 요리점 육삼정(六三亭) 연회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때 그를 암살하고자 동지 이강훈과 폭탄과 수류탄, 권총을 휴대한 채 육삼정에 잠입하였다. 그러나 일명 ‘육삼정’ 의거 당일 아리요시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당일 육삼정 부근 인력거꾼과 식당 종업원으로 위장한 일제 형사들에게 이강훈과 함께 붙잡혔다. 1933년 4월 18일 이른바 살인예비, 치안유지법, 폭발물 취체벌칙 위반, 기물손괴죄로 기소되었으며 7월 5일 예심이 종결되고 나가사키 지방재판소 공판에 회부되었다. 7월 11일에 나가사키로 호송된 후 우가미구치소에 수감되었고 11월 24일 나가사키 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다. 수감생활 도중 건강 악화로 1934년 6월 5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친동생 백용기(白龍基)가 시신을 거두어 나가사키 이사하야 감옥 묘지에 묻혔다가 광복 이후 김구(金九)를 중심으로 유해 봉환이 추진되었고 1946년 7월 6일 윤봉길·이봉창(李奉昌) 의사와 함께 효창공원에 봉안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차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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