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규
白南圭1888. 4. 23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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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8년 4월 23일 경상북도 대구부(大邱府, 현 대구시) 남산동(南山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의원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1915년 12월까지 러시아와 중국에서 항일활동을 하다가 연락책의 임무를 받고 귀국하던 중 붙잡혀 미결수로 1년 동안 옥고를 겪었다. 1919년 2월 10일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고, 같은 해 4월 20일 임시정부의 입법기관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개최한 제2차 회의에 의원으로 참여하여 임시정부 관제를 차장제(次長制)에서 위원제(委員制)로 변경하였다. 또 임시의정원 성립을 국내에 선포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이어 4월 24일 임시의정원 제3차 회의에 참석하여 임시의정원법을 의결하였다. 임시의정원에서는 임시의정법 제정에 따라 4월 30일 이내에 지역별 의원을 선거하기로 하였다. 임시의정원법 제23조에 규정된 의원 숫자는 국내 8도, 중국, 노령, 미주 등 11개 구역에서 51명이었다. 하지만 제3차 임시의정원 회의 이후 선출된 의원은 35명으로, 정원보다 16명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때 28세 나이로 경상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약 1년간 경상도 출신 의원으로 임시의정원에서 활동하였다. 지역별 의원이 선출되면서 임시의정원은 제4차 임시의정원 회의부터 본격적인 의정 활동에 착수하였다. 제4차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여 임시의정원 의장 손정도(孫貞道), 부의장 신정(申檉) 선출, 임시정부 장정 의결, 재원방침에 대한 결의, 임시의정원 세칙 제정에 관한 결의, 러시아에 있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와 통합문제 등을 가결시켰다. 같은 해 5월 2일에는 재원 방침의 방안인 구급(救急) 의연금 모집, 인두세 징수, 내외 공채 모집 등을 가결하였다. 이어 1919년 7월 7일부터 개최된 제5차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여 상임위원회 조직, 국제연맹회의 제출 안건 결의, 국채 통칙과 공채 발행 조례, 외국 공채 발행 등을 결의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대비하여 서재필(徐載弼) 박사를 외교전권특사로 선정하였다. 이중에서 외국 공채 발행권을 국무총리 이승만(李承晩)에게 위임하자는 안건에 대해서는 재청을 하여 가결하였다. 그리고 제5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예산결산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8월 18일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할 당시 임시정부는 러시아의 대한국민의회와 국내 한성정부와의 통합을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법적 근거 마련을 위해서 임시헌법 개정안과 임시정부 개조안을 결의하였다. 1919년 8월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까지 의원으로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하였고 1920년 2월 25일 의원 사면청원이 수리되면서 임시의정원 활동을 마감하였다. 이후 행적은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임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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