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철
金敎哲1880. 7. 27 ~ 1955. 10. 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우정면
- · 장안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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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0년 7월 27일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장안면(長安面, 현 화성시) 수촌리(水村里)에서 태어났다. 다른 자료에는 본적이 화성군 오산리(梧山里)로 기록되어 있다. 7세부터 서당에서 한문 수학을 하였고, 1910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11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1년 만에 졸업한 뒤 1912년 피어슨 성경학원에 입학하였다. 1914년 동 성경학원을 졸업한 후 고향으로 내려와 장진의숙을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16년 남양교회 담임전도사로 파송되어 활동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던 그해 수촌리에 거주하면서 수촌교회와 제암교회를 담임하였다. 4월 3일 우정면(雨汀面)과 장안면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는 수촌리 구장 백낙열(白落烈)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 세력, 석포리(石浦里) 구장 차병한(車炳漢) 및 차희석(車喜植)·차병혁(車炳爀)을 중심으로 한 석포리 유교 토착 세력, 그리고 수촌리 기독교 세력 등이 함께 계획하고 전개하였다. 4월 3일 아침 첫 집결지인 장안면 석포리로 주민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조암(朝岩) 장터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앞세워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장안면 사무소로 행진하였다. 오전 11시경 장안면 사무소에 집결한 시위대는 200여 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참여하려고 장안면 사무소로 달려갔다. 김흥삼(金興三)·이영쇠(李永釗)·차인범(車仁範) 등과 함께 만세를 부르면서 군중을 이끌었다. 이어 이들과 장안면 사무소의 집기를 끄집어내고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이러는 사이 차병한 등이 장안면장 김현묵(金賢默)을 설득하여 앞장세우고 우정면 소재 쌍봉산(雙峯山)에 올라가서 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다시 쌍봉산으로 가던 중 산에서 내려오던 시위 군중과 합류하여 우정면 사무소로 행진하였다. 그곳에 도착하여 이영쇠·김종학(金鍾學)·백순익(白順益) 등과 함께 선두에 서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군중을 이끌었다. 이때 시위 군중은 서류를 끄집어내어 불태우고 면사무소 건물에 돌을 던져 파괴하였다. 오후 3시 반경 2,0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와 함께 우정면 사무소에서 출발하였다. 장안면장인 김현묵이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화수리(花樹里) 경찰관 주재소로 향하였다. 오후 5시경 화수리 경찰관 주재소에 도착하였다. 이영쇠·장제덕(張濟悳)·김응식(金應植)·김여근(金汝根) 등과 함께 몽둥이를 들고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유리창을 부수고 돌을 던져 주재소를 파괴하였는데 이에 경찰이 공포를 쏘며 저항하자 시위 군중은 주재소에 불을 놓았다. 그러자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川端豊太郞)가 총을 쏘며 뛰쳐나왔다. 시위 군중은 그를 추적하여 몽둥이와 돌로 구타하여 처단하였다. 이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8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 재판을 마쳤다. 예심판사는 이 사건이 내란죄에 해당한다고 하여 고등법원으로 송치하였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는 내란죄가 아닌 소요죄에 해당한다고 하여 다시 경성지방법원을 관할재판소로 지정하고 환송하였다. 그런데 1920년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는 고등법원 결정서의 주문에 ‘사건송치’의 문구가 없다는 이유로 ‘공소불수리(控訴不受理)’ 판결을 내렸다. 경성지방법원에서는 재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검사가 다시 경섬복심법원에 항소하였다. 결국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소요·살인·방화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1922년부터 1944년까지 화성 일대인 사강(沙江)·남양(南陽)·오산(梧山)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전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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