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창환
成昌煥1917. 8. 9 ~ 2009. 1. 2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여우회(麗友會)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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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17년 8월 9일 경상북도 달성군(達城君) 유가면(瑜伽面) 본말리(本末里)에서 태어났다. 조부 성대유(成大洧) 때부터 천석꾼 정도의 재산을 모은 부유한 집안으로, 부친 성하근(成夏根)은 경남 창녕에서 한학(漢學)을 하였다. 아우인 성익환(成益煥) 역시 독립운동가이다. 3살 무렵 상주로 이사하였고 8살이 된 1924년, 중무(中畝)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5년간 다녔다. 1928년 가족 전체가 서울로 이사하였고 이듬해인 1929년 재동공립보통학교(현 재동초등학교) 6학년으로 전학하였다. 1930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중학교)에 입학하였다. 5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19세가 된 193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지인이 야마구치(山口)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것을 계기로 야마구치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下關)를 지나는 경로였다. 1936~1937년 무렵, 종래 야마구치 지역의 한국인 학생 친목 단체였던 여우회(麗友會)의 회장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여우회는 ‘고려의 벗’이라는 뜻으로, 모임에는 야마구치 고등학교와 야마구치 고등상업학교, 사립 코우죠(鴻城) 중학교의 학생들 30~40여 명 이상이 모였다. 일본 유학 당시 조선에 비해 경제적으로 윤택한 일본의 환경을 보며 문제 의식을 갖게 되어, 이 모임에서 비판적인 시각을 다른 동료들과 공유하며 이야기하였다. 그 영향으로 여우회는 야마구치 지역 한국인 학생들의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운동단체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1939년 2월 일본 황족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朝香宮 鳩彦王)가 야마구치시를 방문하자 야마구치 고등학교 학생들은 그를 환영하기 위해 도열하였다. 당시 동기생 민병구(閔炳久)와 함께 시내로 외출하였다가 테니스를 치기 위해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이 광경을 목격하고는 두 줄로 도열해 있던 학생들을 지나쳐 학교로 들어갔다. 이를 이유로 일제 경찰이 야마구치 고등학교 학생들을 조사할 때, 함께 조사당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2월 부산의 봉래각(蓬萊閣)에서 열린 졸업생 송별회에서 후임 여우회장 유재우(柳在佑) 등 15인의 동료들과 장래 독립을 위해 신명(身命)을 걸고 투쟁할 것을 맹세하였다. 졸업 후 1940년 4월 24세에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같은 해 7월 11일 결혼하였다. 인천 송도원(松都園)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직후, 신혼집인 충신동에서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붙잡혀 시모노세키 수상경찰서(水上警察署)로 끌려왔다. 1941년 3월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유재우·민병구·황계주(黃啓周)·강석린(姜錫麟)·이경용(李鏡龍)·김세병(金世秉) 등 6인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다. 1941년 7월 25일 기소유예를 받고 사상보호관찰 대상이 되었다. 교토제대에 복학하여 1943년 가을에 졸업한 뒤 조흥은행(朝興銀行)에 취직하였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 연희대학교, 동국대학교 등에 출강하였다. 1952년 11월 30일에 발기된 한국경제학회의 평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53년에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교수가 되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전후 복구와 관련하여 고승제(高承濟)·황병준(黃炳晙) 등의 경제학자들과 함께 이른바 ‘민간주도형 경제개발론’을 제기하였다. 정부가 경제질서에 개입하는 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민간기업이 경제개발계획 실행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을 『사상계』에 기고하였다. 특히 환율의 현실화와 외국원조의 적극적인 이용을 강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노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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