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이
申永貳1856. 6. 9 ~ 1917. 6. 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돌석의진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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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0) 1856년 6월 9일 경상북도 진보군(眞寶郡) 동면(東面) 화매동(花梅洞)(현 영양군 석보면 화매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자는 낙선(洛先)이고, 호는 석강(石剛)이다. 신돌석(申乭石)의병부대에서 의병 활동을 할 때, 본명 대신 자(字)를 사용하였으므로 판결문 등에는 낙선으로 기록되어 있다. 1906년 4월 6일 영해(寧海)(현 영덕군 영해면)에서 창의한 신돌석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집사(執事)·좌선봉장(左先鋒將) 등으로 활동하였다. 평산신씨 일족인 영해의 신돌석으로부터 기의(起義)한다는 통문(通文)을 받은 뒤, 화매동의 배선한(裵善翰), 금조암동(金鳥岩洞)의 윤학이(尹學伊), 영덕읍(盈德邑)의 강근이(姜根伊)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06년 4월 25일 신돌석의진에 편성되어 일본 어민들의 전초기지로 육성되고 있던 울진(蔚珍)을 공격하기 위해 평해군(平海郡)(현 울진군 평해읍)으로 진출하였다. 이날 평해 설산(雪山) 손감역(孫監役)의 집에서 184냥을 수집하고, 이튿날 울진군 남면(南面) 화리시(花里市)(현 매화면 매화리) 유참봉(柳參奉)의 집에서 100냥을 수집하는 등 군자금과 군사를 확보하면서 북상하였다. 그러던 중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의 공격을 받고 패퇴하였다. 1906년 4월 27일 신돌석의병부대와 함께 영양으로 이동하여 진보군 남면(南面)(현 청송군 파천면)에 주둔하였다. 이날 신돌석 등 60여 명과 함께 영덕군(盈德郡) 영해면 원구리(元邱里) 이도사(李都事)의 집에서 군용금 200냥을 모집하였다. 4월 27·28일 영양군 일월면(日月面) 주곡동(注谷洞)(현 주곡리) 조춘평(趙春坪)의 집에서 84냥, 조도사(趙都事)의 집에서 50냥(혹 80냥)과 조총(鳥銃) 1자루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그 해 4월 29일 밤 영양으로 진군하여, 다음날인 4월 30일 영양군 관아를 공격하여 무기고에 보관하고 있던 총(銃) 22자루, 탄환(彈丸) 20발, 수철환(水鐵丸) 1발을 탈취하였으며, 읍민(邑民)이 보관하고 있던 조총 35자루와 화약(火藥) 2근도 확보하였다. 그 뒤 신돌석이 영양군 석보면 소계동(素溪洞)(현 소계리)에서 부대를 두 개로 나누어 남과 북으로 향해 나아갈 때, 귀환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1906년 5월 초 신돌석이 부대를 이끌고 남진하여 청송군 관아를 공격한 뒤 3일간 이전평(梨田坪)에 주둔할 때, 다시 신돌석부대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5월 5일 신돌석 등과 함께 북상하던 중, 안동진위대(安東鎭衛隊)의 공격을 받고 패퇴한 뒤 귀향하여 보부상(褓負商)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4월 30일 다시 신돌석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영양·울진·평해 일원을 전전하며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5월초에는 화매동에서 주민들에게 백미 10두를 군량미로 수집하는 등 의병 활동을 벌이다가 그 해 (음)6월 23일 집으로 돌아왔다가 붙잡혀서 이른바 ‘폭도사건’으로 기소되었다. 1908년 9월 28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겪던 중, 1913년 1월 5년으로 감형되어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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