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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후익

孫厚翼

1888. 11. 25 ~ 1953.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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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손후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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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경주(慶州)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경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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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신건동맹단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경북유림단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8년 11월 25일 경상북도 경주군(慶州郡) 강동면(江東面) 오금리(五琴里)에서 태어났다. 본적지는 경남 울산군(蔚山郡) 범서면(凡西面) 입암리(立岩里)이며, 38세 때 입암으로 이주하였다. 본관은 월성(月城)이며 호는 문암(文巖)이다. 아버지 손진수(孫晋洙, 손진인(孫晋仁))는 영남 유림단 군자금 모집의 책임을 맡아 활동하였고, 어머니는 이순구(李順久)이다. 작은 아버지 손진형(孫晋衡)은 을사늑약 반대운동에 가담하고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동생 손학익(孫鶴翼) 또한 항일운동으로 수차례 옥고를 겪었다. 둘째 딸은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함께 펼쳤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의 아들과 결혼하였다. 5세부터 유학자이자 의병활동에 참여했던 조부 손최수(孫最秀)에게 유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914년에는 장석영(張錫英)의 문인으로서 운도재(雲陶齋)에서 수학하였고,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중업(李中業)·곽종석(郭鍾錫)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유학자로서 1905년 영남 유림의 을사늑약 폐기 상소에 참가하였고, 1910년 강제병합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구국운동에 참여하였다. 1923년 5월 중순 정수기(鄭守基)로부터 베이징(北京)에 체류하고 있는 김창숙(金昌淑)이 군자금 100원 정도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자금을 마련하여 보냈다. 1925년 10월 27일에는 서울에 체류하고 있던 김창숙을 만나, 내몽골 장자커우(張家口) 부근에 황무지를 개척하여 마을을 만들고 한인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한편 학교를 설립하고 유학생을 파견하여 군사 교육을 실시한 후 독립을 준비할 것이라는 계획을 들었다. 이를 위해 10만 원의 자금을 마련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각 방면에서 자금 모집에 노력하였다. 이때 자금 모집을 위해 김창숙이 만든 비밀결사 신건동맹단(新建同盟團)의 일원이 되었고, 경주·울산 지방을 맡았다. 1926년 2월 초 김창숙이 국내 군자금 모금을 위해 영남 지역을 순회하던 중 자동차 사고로 부상을 입자, 자택에서 요양을 하게 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간호하였다. 1926년 3월 3일 무렵 김창숙이 동래군(東萊郡) 범어사(梵魚寺)로 갈 때 동행하여 그 지역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예정했던 금액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김창숙·정수기·이재락(李在洛) 등과 논의하여 군자금 모집에 불응하거나 소액을 응모한 부호들에게 거액 응모를 요구하기로 결정하고 방법을 논의하던 중 붙잡혔다. 1927년 3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과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 6월(미결구류일수 중 60일 본형 산입)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1945년 12월 30일에는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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