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순흥
孫順興1908. 10. 16 ~ 1956. 5. 3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황간청년회
- · 영동농민조합
- · 적우동맹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영동농민조합 사건
- · 적우동맹 조직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1908년 10월 16일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황간면(黃澗面) 남성리(南城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손석남(孫奭男)이고 호는 우석(宇奭)·산남(山南)이다. 17세 때 영동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히로시마(廣島)로 건너가 15개월간 노동에 종사하였다. 귀국 후인 1926년에는 황간청년회에 가입하여 간부로 활동하면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10월 황간청년회·영동청년회·용화청년회·양강청년회·영동노동청년회의 5단체가 연합하여 영동청년연맹을 조직하였을 때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청년회 활동 중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고 이를 바탕으로 항일 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 1929년 영동노동자청년회가 영동농민조합으로 개조되었을 때 검사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조직의 확대·강화에 노력하였다. 영동농민조합의 강령은 “공고한 단결력으로 무산농민 대중의 생활 향상을 기하고, 일상 투쟁을 통해 무산농민 대중의 경제적·사회적 이익 획득을 기하며, 무산농민 대중의 의식적 교양을 철저하게 도모하는 동시에 고루한 봉건적 유풍을 소멸시키는 것”이었다. 단원의 수는 영동군 내에서만 500~600명 정도였다.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조직된 단체였지만 표면적으로는 합법적 농민단체였다. 1930년 5월 영동농민조합 황간지부가 설치될 때 주도적 역할을 하는 등 조직 확대에 힘썼다. 1931년 3월 3일 김태수(金台洙)·김용찬(金容瓚)·김용각(金容珏)·이상용(李尙鎔) 등과 함께 영동 읍청루에 모여 영동농민조합과 별개의 사회주의 운동 단체를 조직할 것을 논의하고 동지를 규합하였다. 그 해 3월 9일 김용찬의 집에서, 4월 4일 이상용의 집, 4월 말 삼산여관에서 모여 협의한 후 적우동맹(赤友同盟)을 조직하고 선전조직부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적우동맹의 강령은 유물변증법적 입장으로 널리 사물을 인식하고, 세계무산계급 해방운동의 전위가 되어 신사회 건설을 기하는 것이었다. 강령에 따라 적우동맹은 일제 식민지 통치를 부정하고 비밀결사를 통한 농민운동의 활성화를 도모하는 한편 동맹파업·소작쟁의 등을 배후에서 지도하였다. 같은 해 7월 중순경 최판흥(崔判興)과 함께 영동농민조합 황간지부원인 김순화(金順化)·박개천(朴開天)·박기철(朴基喆)·방영준(方英俊)·김완수(金完洙)·박찬영(朴燦永) 등 십 수 명을 신흥리 모래밭에 모아놓고, 일반교양을 지하에서 행하기 위해 최용근(崔龍根)·김완수·방영준·이승화(李承和)·박찬영·박기철 등 6명을 교양부원으로 선출하였다. 그리고 선출된 교양원이 황간 지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달라는 취지의 폐회사를 하였다. 11월 25일 같은 마을에 거주하는 변성천의 집과 황간 농민조합지부에서 십 수 명의 회원들을 모아놓고 7월에 선임된 교양부원들이 활동하지 않아 유명무실해졌다며, 신봉수(申鳳洙)·김완수·박찬영·이영화 등 4인을 새로운 교양부원으로 다시 선출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영동경찰서에 붙잡혔다. 1933년 6월 13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미결구류일수 중 15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34년 7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미결구류일수 중 300일 본형 산입)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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