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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만

宋在萬

1891. 10. 15 ~ 1951.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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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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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산(瑞山)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서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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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충청남도 서산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1년 10월 15일 충청남도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大湖芝面, 현재 당진군) 조금리(調琴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대호지면의 면사무소 직원으로 근무했다. 4월 4일 서산군 대호지면과 정미면(貞美面) 천의(天宜)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호지면 도호의숙(桃湖義塾) 출신의 남주원(南柱元)·이두하(李斗夏)·남계창(南啓昌)·남상직(南相直)·남상락(南相洛) 등 유생들은 1919년 3월 서울에서 열리는 고종 장례식에 참여하였는데, 여기서 만세운동을 접할 수 있었다. 이후 서산 지역에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지면서 시위 열기가 고조되었다. 이후 서산군 대호지면에서 면장 이인정(李寅正)을 비롯하여 면서기 김동운(金東云)·강태완(姜太玩)·민재봉(閔載鳳)과 함께 직접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인근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뒤 대호지면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거사일은 천의장터 장날인 4월 4일로 결정하고, 사전에 면내의 각 리(里)별로 연락망을 구성하였다. 다수의 주민들을 만세시위에 참여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도로수선병목정리(道路修繕並木整理)의 건」이라는 공문을 각 마을에 보내 도로 보수를 위해 한집에 한명씩 4월 4일 면사무소로 모이라는 내용을 전달하였다. 4월 4일 아침 면사무소 앞에 집결한 600여 명의 주민들에게 면장 이인정이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해 달라고 연설함에 대다수의 주민들이 동의하여 합류하였다. 만세 시위대를 지휘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천의장터로 향하였다. 시위 대열이 천의장터로 행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만세 운동을 목격하고 속속 동참하여 시위대의 규모는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과 함께 장터의 한복판에 대형 태극기를 세우고 조선 독립에 대한 연설회를 개최한 뒤, 천의주재소(天宜駐在所)의 순사들을 무력화시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는 만세시위를 지휘하였다. 만세시위가 마무리될 무렵 천의장터로 급파된 당진경찰서 순사들의 발포로 4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시위 참여자들이 일제 경찰들을 구타하여 이들이 소지한 무기를 탈취하도록 지휘하였다. 또 부상당한 일제 경찰들이 주재소로 도주하자, 시위대와 함께 쫓아가서 주재소의 습격을 지휘하여 완전히 파괴시켰다. 4월 5일 대호지면으로 출동한 홍성헌병수비대에 붙잡혔다. 일제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만세 운동의 준비는 자신의 단독 행위임을 진술하여 다수 동지들의 희생을 막고자 노력하였지만, 천의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10월 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공문서 위조죄, 소요죄 등으로 징역 5년의 중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는데, 같은 해 12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원판결이 취소되었으나 1심과 동일한 징역 5년을 다시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1920년 2월 7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출옥한 이후에도 일제 경찰로부터 계속적으로 사찰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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