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칠성
成七星1878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0)
관련 사건
- · 1919년 경상북도 영덕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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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0)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방가동(芳佳洞)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9년 당시 42세로 1878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3월 19일 창수면 창수동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창수면 만세운동은 경북 영덕 지방의 만세운동에서도 격렬하게 전개된 시위 중 하나로 꼽힌다. 창수면의 운동은 하루 전날인 3월 18일 영해면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영해면에서는 성내시장 장날을 맞이하여 기독교인 김세영(金世榮)·권태원(權泰源)·정규하(丁奎河) 등을 중심으로 영덕 각지에서 2,0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게 되었다. 영해면의 만세시위 소식은 곧 영덕군 각지로 퍼져서 병곡면·지품면·창수면의 만세시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창수면에서는 이종구(李鐘龜)를 비롯한 창수면 오촌동(梧村洞)과 삼계동(三溪洞) 주민들이 영해면 시위에 참여하기 위하여 영해면을 향해 가던 중에, 신기동(新基洞) 마을 구장인 이현설(李鉉卨)과 신기동 마을 주민을 만난 것을 계기로 영해면으로 가는 것을 중지하고 오히려 창수면 내에서 만세시위를 계획하자고 결정하였다. 신기동에서는 이전부터 도로공사 과정에서 벌어진 토지 강제수용 문제로 인하여, 주민들이 일제의 방침에 크게 불만을 가지고 있던 차였다. 그러던 중에 오촌동과 삼계동 주민들과 조우하여, 이미 영해면으로 가서 시위에 참여하기는 늦었으니 방향을 돌려 창수동에 있는 창수주재소를 공격할 것을 협의하였다. 이에 따라 이현설을 비롯하여 창수동 마을 구장인 이수각(李壽珏)과 그 아들 이학술(李學述) 등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사람들을 독려하여 시위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영양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장구동(場邱洞)에서 이학술의 권유를 받아 시위대에 합류하게 되었다. 시위 군중은 행진을 계속하여 오후 4시 경 창수주재소 앞에 집결하게 되었는데, 이때 400여 명으로 인원이 증가하였다. 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혹은 무기를 들고 혹은 맨손으로 창수주재소를 공격하였다. 다른 이들과 함께 주재소로 가서 돌을 던지며 주재소 벽을 파괴하였다. 주재소 건물을 비롯하여 주재소의 기물과 공문서를 훼손하는데 앞장섰고, 또한 창수동 한국인 순사들의 집으로 가서 집에 숨겨두었던 순사들의 물품을 파괴하였다. 오후 7시 경 시위 군중은 자진해서 해산하였고, 자택으로 귀가하였다가 이후 경찰에 붙잡혀 4월 22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건조물 손괴죄·가택 침입죄·공문서 훼기죄, 각 기물 손괴죄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같은 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었으나 다시 1심과 같은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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