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덕영
申德永1889. 5. 9 ~ 1968. 5. 2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동단
- · 대한독립공명단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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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3) 1889년 5월 9일 충청북도 음성군(陰城郡) 음성면(陰城面) 읍내리(邑內里)에서 태어났다. 호는 하관(何觀)이다. 이명으로 신백한(申佰漢)·(申伯漢)·(申白漢)이평(李平)·한부(韓扶)·이창록(李昌錄)·이백한(李伯漢)·신덕영(申德榮)·신성림(申晟林) 등을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신병선(申炳善)이다. 부인은 오씨(吳氏)이며 장녀는 신채술(申彩述)이고 차녀는 신해경(申惠敬)이다. 경술국치 이후 남만주로 이주하였다. 1913년 류허현(柳河縣) 합니하(合泥河)에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였다. 이후 독립군 북간도무관학교(北間島武官學校)에서 한학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서울로 이동하였다. 소격동(昭格洞)에 거주하며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고 이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고자 하였다. 같은 해 (음)7월 김진규(金晉圭)와 만나서 그의 소개장을 받아 경북 문경(聞慶)으로 이동하였다. 문경에서 정인옥(鄭仁玉)에게 독립선언서, 독립신문, 권총 2정과 탄약 18발을 제공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도록 지시하였다. 정인옥은 그 해 9월 7일 경북 영주군(榮州郡) 부석면(浮石面) 용암리(龍岩里) 김규수(金圭秀)의 집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고 이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1919년 (음)7월 무렵 대동단(大同團)에 참가하여 대동단 조선지부장이 되었다. 같은 해 (음)11월 강원도 원주군(原州郡) 소초면(所草面) 둔둔리(屯屯里)에서 최양옥(崔養玉)을 만나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관해 협의하였다. (음)4월 하순 최양옥을 서울로 불러 박일봉(朴日鳳)과 함께 전남지역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로 계획하였다. 1920년 (음)3~4월경 인천부(仁川府) 해안정(海岸町)(현 인천광역시 중구 해안동) 박복경(朴福京)의 집에서 노형규(盧衡奎)를 만났고, 7월 18일 서울 입정정(笠井町)(현 서울특별시 중구 입정동) 자택에서 노형규·노석중(盧錫中)과 함께 전남 지역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로 계획하였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고자 7월 만주농림주식회사(滿洲農林株式會社)를 설립하였다. 6월 무렵 정수현(鄭壽賢), 8~9월경 양인묵(梁仁黙), 9월 초 윤영기(尹永淇)를 동지로 규합하였다. 1920년 7월 대동단 총재 김가진(金嘉鎭)과 대동단 조선지부장 한부(韓扶)의 명의로 된 ‘독립운동자금을 의연(義捐)하라’는 내용의 포고문을 전남 광주군(光州郡) 본촌면(本村面) 일곡리(日谷里)(현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 노종룡(盧鍾龍), 광주군 본촌면 양지리(陽池里)(현 광주광역시 북구 양산동) 정해붕(鄭海鵬), 광주군 오치면(梧峙面) 방축리(防築里)(현 광주광역시 북구 문흥동) 이계익(李啓翼), 전남 화순군(和順郡) 능주면(綾州面) 읍내 양재국(梁在國), 화순군 화순면 향청리(鄕廳里) 박현경(朴賢景), 전남 담양군(潭陽郡) 담양면(潭陽面) 주리(舟里) 국채웅(鞠埰雄)에게 우송하였다. 같은 시기 동지들과 함께 협의하여 실행반·연락반·조사반을 두고, 광주에 거주하고 있던 노석중이 지휘하여 일제 경찰의 움직임을 파악하도록 하였다.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 위한 예비조사도 시행하였다. 김성만(金聖萬)·박일봉과 함께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사용할 무기 확보 방안을 협의하여 김성만을 평남 안주(安州)에 보내 권총 1정과 실탄 7발을 조달하였다. 1920년 (음)7월 광주로 이동하여 노형규·노석중과 만났고 노형규의 친척 조명석(趙明錫)의 집에 머물렀다. (음)7월 하순 노형규와 함께 박현경을 화순군 화순면 광덕리(廣德里) 노형규의 집으로 불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1920년 (음)8월 서울로 이동하여 유선주(劉善柱)를 만나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관해 협의하였다. 최양옥을 광주로 파견하였고 정수현에게는 모의 권총 2정을 입수하도록 하였다. (음)8월 20일경 유선주로부터 권총 1정과 실탄 7발을 받아 (음)8월 27일 광주로 이동하였다. (음)8월 28일 노석정과 함께 곡성군 삼지면(三岐面) 월경리(月境里) 정호필(鄭鎬弼)의 집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1920년 (음)9월 10일 노석정과 함께 곡성군 화면(火面) 화대리(火垈里) 정원채(鄭遠采)의 집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고, 다음날인 11일 화면 봉동리(鳳東里) 신유선(申有善)의 집에서 신대선(辛大善)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요구하였다. 9월 17일과 (음)9월 23일 노석정을 정필호의 집으로 보내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음)9월 22일 최양옥·노석정과 함께 곡성군 겸면(兼面) 칠봉리(七峯里)에서 심상홍(沈相洪)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요구하였다. 1920년 11월 10일 광주군 효천면(孝泉面) 양림리(楊林里)(현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유한선(劉漢先)의 집에서 모집반을 2개로 편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제1반인 박일봉·이윤호(李允鎬)가 화순군·나주군(羅州郡) 방면을 담당하고, 유사시에는 화순군 동복면(同福面) 오모(吳某)의 집에 통보하기로 하였다. 최양옥과 함께 제2반에 편성되어 노기준이 담양군·곡성군 방면을 담당하고 유사시에는 곡성군 옥과면(玉果面) 합강리(合江里) 고인식(高仁植)의 집에 통보하기로 하였다. 노석중과 노상영(盧庠永)은 2개 모집반의 연락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1920년 11월 말 전남에서 일제 경찰의 체포를 피해 모집된 자금을 가지고 서울로 이동하였으나, 서울에서 붙잡혔다. 동지들과 함께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과 총포화약류취체령시행규칙 위반, 공갈, 가택 침입, 방화미수 등으로 광주지방법원 재판에 넘겨졌다. 1921년 3월 8일 재판이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3월 17일로 연기되었다. 변호인단의 요청으로 재판은 다시 연기되어 같은 해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1호 법정에서 제1회 공판이 열렸다. 변호인단은 김병로(金炳魯)·김종건(金鍾健)·송태환(宋台煥)·노병수(盧丙洙)·이정상(李政相) 등으로 구성되었다. 4월 27일 열린 공판에서 검사가 징역 8년을 구형하였다. 선고 공판은 5월 7일에서 5월 24일로 다시 5월 31일로 변경되었다. 제1심에서 징역 8년을 받았다. 하지만 불복하고 최양옥·노석정·노석중·양인묵·노형규와 함께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었다.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늑막염이 발병하여 보석신청하여 1923년 5월 5일 풀려났다.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상태가 호전되자, 1924년 (음)4월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탈출하였다. 이후 허베이성(河北省) 스자좡(石家莊)으로 이동하여 머물렀다. 1928년 (음)4월경 최양옥에게 중국으로 오라는 서신을 보내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에서 만났다. (음)6월 타이위안부(太原俯) 해자변문패(海子邊門牌) 3호로 주거를 옮겼다. 여기에서 안창남(安昌男)·최양옥·김정련·이화(李華)·이영(李英) 등과 함께 대한독립공명단(大韓獨立共鳴團)(이하 공명단)을 조직하고 부단장에 선임되었다. 공명단에서는 단장과 부단장 외에 재정부(財政部)·정치부(政治部)·군사부(軍事部)를 두었고, 무관학교와 비행학교를 세워 독립군 대원과 비행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또한, 서울지부를 조직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1928년 (음)9월 하순 안창남·최양옥·김정련 등과 함께 협의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최양옥과 김정련을 무장시켜 국내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1929년 4월 서울로 이동한 최양옥과 김정련은 경기도 양주군(楊州郡)(현 서울 망우리 부근)에서 서울에서 춘천(春川)으로 이동하는 우편물 수송차를 공격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모두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9년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 있는 친족 신두선(申斗善)의 집에 머물며 기회를 엿보다가 1932년 6월 22일 하얼빈에서 일제에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7월 13일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겪고 형기를 8개월 남겨 놓은 1934년 10월 14일에 가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최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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