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재
辛光在1885. 8 ~ 192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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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서로군정서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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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5) 1885년 8월 경상남도 울산군(蔚山郡)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원복(韓元復)을 사용하였다. 서로군정서 암살대장으로 만주와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망명 시기는 정확치 않으나 서울에서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압록강을 넘어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서간도에 도착한 후 퉁화현(通化縣)에 있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교해 무관교육을 받았다. 신흥무관학교는 1919년 만세운동 후인 1919년 (음)5월 신흥중학이 무관학교로 개편된 학교였다. 류허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 있는 본교는 2년제로 고급간부를 양성하는 학교였고, 퉁화현 합니하(哈泥河)·7도구(道溝)·쾌대모자(快大帽子) 등지에 설치된 분교는 3개월의 일반훈련과 6개월의 간부후보 교육 등 총 9개월간 군사교육을 실시하여 무관을 양성하는 사관학교였다. 1920년 6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소속의 암살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광복에 대한 의지가 고조되자 서간도 독립운동지도자들은 자치기관 성격이 강했던 부민단(扶民團)을 한족회(韓族會)로 변경하였다. 한족회 지도자들은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간부들과 협의해 1919년 11월 항일무장활동을 수행할 서로군정서를 설립하였다. 독판(督辦) 이상룡(李相龍), 부독판 여준(呂準)인 서로군정서는 정무·내무·법무·군무·참모부 등의 행정부서와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지청천(池靑天)이 사령관인 사령부는 서로군정서 의용대를 조직하였고, 암살대는 의용대의 별동대였다. 암살대 대원 10여 명은 대부분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었고, 일부는 헌병보조원 또는 면서기 출신도 있었다. 암살대는 본부를 지안현(輯安縣) 추피구(楸皮溝)에 두고, 본부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추피구 관문랍자(關門拉子)·석호구(石湖溝)·대청구(大靑溝) 등과 국내의 평안북도 자성군(慈城郡) 조아동(照牙洞) 등에 잠복지를 만들어 일본군의 침투를 감시하고 국내진입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대원들 간 암살대를 지칭할 때는 ‘기관(機關)’이라 불러 조직의 명칭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주의하였다. 1920년 1월 대원 정훈철(鄭勳哲)과 이창덕(李昌德)에게 자성군 조아동에 거주하는 일본인 부호 나가미 칸쿠로(永見寬九郞)의 집을 습격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이창덕·정훈철이 포함된 유격대를 구성해 자성군으로 진입시켜 삼흥면(三興面) 서해동(西海洞)에서 세금을 징수해 돌아가는 면서기를 습격해 거액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밖에도 암살대 대원들은 1920년 초부터 6월까지 1,350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암살대가 모집한 이 군자금은 아주 일부만 대원들의 식비와 운영비로 쓰고, 나머지 전액은 신흥무관학교에 보내 교비로 활용하였다. 암살대의 이 같은 활동을 간파한 일제는 1920년 6월 하순 사카모토(坂本) 경찰고문을 지휘관으로 한 수색조를 만들어 본부와 잠복지를 기습 공격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일본경찰대의 공격을 사전에 알아채고 대원들과 함께 몸을 피하였다. 이때 암살대 경리위원 이화영(李和榮)과 자성군 조아동 잠복지에 거주하며 통신원 역할을 하던 김봉식(金封植) 등 두 사람이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서로군정서 의용대와 그 별동대인 암살대, 그리고 1919년 만세운동을 전후 해 서북간도 여러 지역 설립된 많은 독립군단 소속의 독립군들이 수시로 국내로 진입해 무장전투를 전개하자 일제는 1920년 10월 약 2만 명의 일본군들을 서북간도 독립운동기지를 향해 침입시켰다. 일본군들은 한국에 주둔한 제19·20사단을 주력으로 해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서북간도를 포위 공격해 들어 왔다. 그러나 일본군의 이 계획을 사전에 간파한 독립군들은 일시적으로 피신했다 돌아오기로 계획하고 독립군단들 간에 서로 연락을 취하며 백두산록 서쪽을 향해 이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1920년 10월 20일경 추격하는 일본군과 이동 중의 독립군 간에 일어난 것이 청산리전투였다.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들은 북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반면에 1,0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며 대패한 일본군은 독립군에게 당한 분풀이를 한인사회에 쏟아 부었다. 1920년 10월과 11월 두 달간 일본군은 약 3,700명에 가까운 한인을 살해하고, 3,500여 동의 민가와 59개의 민족학교, 19개의 교회를 소각하거나 파괴해 잿더미로 만들었다. 일본군의 학살은 이듬해 4월까지 이어졌다. 서로군정서 의용대의 경우 주력부대는 사령관 지청천이 이끌고 연해주로 넘어갔다. 그리고 남아있던 일부와 암살대는 근거지 주변의 산간오지로 피신했다가 일본군이 물러가자 진영이나 마을로 돌아왔다. 1921년 봄, 독판 이상룡의 명을 받고 의용대장에 임명되어 돌아 온 병사들을 소집해 의용대를 다시 조직하였다. 그리고 몇 명의 부하들을 연해주로 보내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사령관 홍범도(洪範圖)에게 무기를 지원해 줄 것을 청하였다. 홍범도는 그 해 5월경 많은 양의 장총과 권총, 그리고 탄약 등을 보내왔다. 무장력이 갖추어지자 의용대의 진영을 린장현(臨江縣) 홍토애(紅土崖)에 구축하고, 향후 독립군들의 활동을 지원해주길 바라며 주변의 중국 관리들을 초대해 향연을 베풀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압록강변에 부하들을 배치해 국내진입전을 준비시켰다. 그러나 그 해 7월 중병에 걸려 홍토애의 본부에서 자리보전하고 말았다. 의용대는 지난해 6월 사카모토 수색대에 붙잡혔다가 6개월 만에 도망쳐 온 이화영이 대장대리가 되어 이끌었다. 이후 한 달만인 1921년 8월경 린장현 홍토애의 의용대 본부에서 사망하였다. 1922년 9월 서로군정서 의용대에서는 추도회를 개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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