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국호
申國浩1900. 12. 10 ~ 1924. 10. 1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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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00년 12월 10일 전라남도 장성군(長城郡) 북이면(北二面) 모현리(茅峴里)에서 신병식(申昞植)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이명으로 신경호(申景浩)·신국홍(申國洪)을 사용하였다. 이후 큰아버지인 신경식(申耕植) 슬하로 입양되었으며, 유학자 기동준(奇東準) 아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19년 4월 3일과 4일 이틀 간 일어난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가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 만세운동은 4월 3일 마을 주막에서 고용석(高龍錫)·유상설(柳相卨)이 “파리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어 많은 나라가 독립하게 되었으며, 한국 역시 독립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궐기하고 있다”고 하여 만세운동 궐기를 권유하자, 정병모(鄭秉謨)·신태식(申台植) 등이 호응하여 시작되었다. 고용석 등은 4월 3일 밤 ‘대한독립기(大韓獨立旗)’라고 쓰인 태극기를 들고 모현리 일대를 행진하였는데, 이 행렬에 함께 참가하여 만세를 외쳤다. 이에 모현리의 일제 헌병들은 유상설과 고용석 등 4인을 주재소로 끌고갔다. 이에 다음날인 4월 4일 오전에 붙잡혀 간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서서 100여 명의 동리 주민들을 인솔하여 모현리 일대를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진압에 나선 일제 헌병들에 의해 주재소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고, 만세운동의 주도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되어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19년 4월 2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같은 해 5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어 징역 1년으로 감형되었다. 재차 “대한독립과 만세운동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상고하였으나, 그해 7월 10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광주감옥 전주분감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0년 4월 풀려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생업과 공부에 힘썼으나, 병으로 인해 1924년 10월 10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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