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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휴

申喆休

1898. 5. 17 ~ 1980.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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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신철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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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읍내(邑內)의열투쟁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읍내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의열단
  • · 신간회 고령지회
  • · 경북청년연맹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밀양 폭탄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98년 5월 17일 경상북도 읍내면(邑內面) 치사리(致士里; 현 대가야읍 고아리)에서 신진구(申鎭求)와 달성(達城) 서씨(徐氏) 슬하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호는 해영(海影)이며, 이명으로 신우동(申愚童)·신우룡(申愚龍)·신룡(申龍)을 사용하였다. 1912년 고령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령군청에 급사(給仕)로 들어갔으며 1915년 고원(雇員)이 되었다. 일제의 무단통치와 경제수탈에 불만을 품고 1918년 군청을 사직한 후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음)8월 펑톈(奉天)에서 김원봉(金元鳳)과 알게 되어 그의 권유로 지린(吉林)으로 가서 10월에 이종암(李鍾岩)·이성우(李成宇)·서상락(徐相洛)·강세우(姜世宇) 등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과 합류하고 한 중국인 집에서 합숙하며 폭탄 제조법을 익혔다. 이어서 11월 10일 동지 9명과 함께 의열단(義烈團) 창단 회합에 참석하고 창립 단원이 되었다. 의열단은 총독통치 하의 일본인 고관과 한국인 민족반역자 부류, 식민지 지배의 정치기관·선전기관·폭압기구·수탈기구 및 부속 시설물을 겨냥한 고강도의 ‘암살파괴운동’을 전개할 것을 활동 목표로 삼았다. 제1차로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매일신보사(每日申報社)·경기도 경찰부 등 주요기관 투탄 폭파와 요인 암살의 특공거사를 감행키로 결의하였다. 이 거사를 위해 김원봉 등에 의해 상하이(上海)에서 폭탄 구득이 추진되고 있던 중인 1920년 (음)1월 하순에 서울로 잠입하였다. 경남 밀양(密陽)에 가 있던 4월 중순에 단원 한봉근(韓鳳根)의 집에서 부단장 곽재기(郭在驥)와 만났고, 구입된 폭탄 3개가 밀양으로 밀반입되어 보관 중임을 고지 받음과 아울러 윤소룡(尹小龍)·한봉근과 함께 투탄 실행 요원이 되기로 약정하였다. 그 후 격문 인쇄비의 조달 문제로 거사 실행이 지연되고 있던 중에 첩보를 입수하여 수사에 나선 경기도경찰부에서 6월 20일부터 검거를 개시하여, 밀입국 단원 대부분이 은신처에서 혹은 도피 중에 계속 붙잡혀가던 끝에 맨 마지막으로 7월 하순경 붙잡혔다. 그 후 7개월여 동안 혹독한 고문이 수반된 경찰 조사와 검사국 예심을 거쳐 재판에 회부되었다. 1921년 6월 21일 이른바 폭발물취체규칙과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7년을 받았다. 마포의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겪다 형기 만료 9개월 전인 1925년 7월 2일, 위장병이 심해져 가출옥으로 풀려났다. 1925년 11월 5일 고령의 고아동 자택에서 일제 경찰에 다시 붙잡혀 11월 25일 구류처분을 받고 유치되어 있던 중 12월 2일 대구의 경북경찰부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만주에서 밀입국한 이종암이 경남·북 일원의 동지들과 접촉하며 암행하고 있음이 일제 경찰에 포착되어 그들 모두가 붙잡힌 ‘경북 의열단 사건’ 관련자로 지목되어서였다. 그러나 조사 결과 혐의 없음이 판명되어 12월 7일 풀려났다. 1926년 8월 25일에도 고령경찰서에 붙잡혀 구금되었다가 청주경찰서로 압송되어갔다. 충북 일원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이던 비밀결사 일심단(一心團)의 단장 김진성(金振聲)과 4명 단원이 열흘 전 체포된 일의 여파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혐의 없음으로 판명되어 곧 풀려났다. 조선일보 고령지국을 개설하여 운영하면서 1928년 1월 6일부터 김천(金泉)청년동맹회관에서 열린 경북기자대회(慶北記者大會)에 참석하였고, 폐회 후 참석자 간담회를 통해 1월 8일 창립을 본 경북청년연맹(慶北靑年聯盟)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신간회(新幹會) 고령지회 설립을 주도하여 1927년 9월 16일 고령청년회관에서 창립시킨 후 1929년 2월 17일 제3회 정기총회에서 지회장 변희용(卞熙鎔)과 함께 본부 대의원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8월 10일 고령청년동맹회관에서 열린 제1회 임시대회에서 서기장 겸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신간회 해체 후인 1932년 12월에 조선중앙일보 고령지국장이 되었다. 이후의 활동은 확인할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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