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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갑선

申甲善

1897. 9. 16 ~ 1994.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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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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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원(昌原)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창원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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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2)

관련 사건

  • · 창원군 창원장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2) 1897년 9월 16일 경상남도 창원군(昌原郡) 상남면(上南面) 서곡리(西谷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신갑선(申甲先)을 사용하였다. 1919년 3월 23일과 4월 2일에 일어난 창원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창원 장터 만세운동의 주도자 중 한 명인 설관수(薛灌洙)가 배중세(裵重世)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고, 1919년 3월 중순경 지역의 민족주의 인사들과 거사를 논의하였는데 이때 참여하여 만세운동 준비에 나섰다. 창원면 중동(中洞)의 청년회관에서 공도수(孔道守)·구재균(具在均)·김호원(金浩元)·조윤호(曺潤鎬)·조희순(曺喜舜)·송석민(宋錫敏)·감태순(甘泰舜)·박화열(朴和熱)·신경환(申璟煥) 등과 함께 거사를 결의하고, 만세운동 날짜를 3월 23일로 결정하였다. 또한 군중들에게 배포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제작, 군중 동원을 위한 연락 분담 등 준비 작업을 하였다. 이때 거주지인 상남면과 그 외 마산, 웅천 등지의 연락과 인원 동원에 대한 책임을 맡았다. 1919년 3월 23일, 오후 2시경 설관수 등 주도자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사전에 연락을 받고 집결한 군중들과 장터에 나온 사람들, 그리고 시장 상인들까지 호응하면서 순식간에 대규모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시위대를 이끌고 선두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장 곳곳을 행진하였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호응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시위대 규모는 5,000명으로 늘었다. 창원군 중심가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일제 군경이 신속하게 진압에 나섰다. 마산중포병대대와 진해요항부에서도 병력이 파견되어 진압에 가세하였다. 일제 군경의 본격적인 해산과 체포 작전이 이루어지면서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50여 명이 붙잡혔다. 결국 저녁 무렵 시위대는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일제 군경의 검거망을 빠져나와 몸을 피한 주도자들과 4월 2일 장날에 다시 읍내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재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군중 동원을 위한 연락과 태극기 등 시위 도구 제작 등의 준비 작업도 동일하게 이루어졌다. 4월 2일 오후 3시경 다시 만세시위가 시작되자, 주도자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군중들의 호응은 3월 23일 만세 시위 때보다 높았다. 시위대 규모도 6,000명을 헤아렸고, 시장의 상인들도 상점을 닫고 보다 적극적으로 만세시위에 가담하였으며 시위 양상도 보다 격렬하였다.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다가 일제 군경의 폭력적인 진압과 검거 작전이 시작되자, 피하지 못하고 결국 붙잡히고 말았다. 일제 군경의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져 1919년 5월 9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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