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의
朴治毅1900. 1. 3 ~ 1921.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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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장(196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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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2) 1900년 1월 3일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남면(南面) 삼봉동(三峰洞)에서 부친 박은진(朴殷鎭)의 셋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호는 청헌(淸軒)이다. 1907년까지 한학을 수학하였고, 삼봉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선천읍(宣川邑)에 위치했던 기독교계 사립신성학교(私立信聖學校)에 입학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선천 삼봉교회 교인으로, 친형인 박치조(朴治祚)가 3월 10일 삼봉동에서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는데, 이때 시위 계획에 함께 참여하였다고 한다. 1920년 7월 미국의원단이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서울을 갈 때 선천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이때 박건채(朴健采) 등과 함께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여 미국위원단에 제출하고 선천역과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독립 의지를 알리려고 하였다. 만주 콴뎬현(寬甸縣)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대원 이학필(李學弼)·임용일(林龍日)·김응식(金應植) 등과 함께 같은 해 8월 24일 선천역과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국경 경비 때문에 8월 30일에야 폭탄 2개, 소총, 권총 등이 도착하여 계획대로 시위를 실행할 수 없었다. 미국의원단도 이미 선천을 지나 서울로 떠났기 때문에 시위 날짜를 변경하여 시위일을 8월 31일로 결정하였다. 선천군청과 선천경찰서를 목표로 설정하고, 「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 40~50장과 격문을 배포하기로 하였다. 1920년 9월 1일 새벽 3시에 시위를 실행하였다. 이학필·김응식이 선천군청에 던진 폭탄은 불발이었고, 임용일·박치조와 함께 선천경찰서 현관에 폭탄을 던져 경찰서 현관과 담벼락이 파괴되었다. 시위 현장에 광복군총영 인장이 찍힌 “적국의 관리된 자에 고함”과 “재산가의 의연을 청함”이라는 제목의 경고문을 배포하였다. 이 일로 1920년 9월 2일 형 박치조와 함께 붙잡혀 선천경찰서에 갇혔다. 1920년 12월 20일 평양지방법원 선천지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과 폭발물취체벌칙 위반으로 사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21년 4월 1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그대로 사형을 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해 7월 2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원심이 확정되었다. 같은 해 9월 30일 오후 1시 30분경 평양감옥에서 형이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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