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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순봉

嚴舜奉

1906 ~ 1938.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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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엄순봉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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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양(英陽)중국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한족총연합회
  • · 재만조선인무정부의자동맹
  • · 남화한인청년연맹
  • · 흑색공포단
  • · 서간단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육삼정 의거
  • · 옥관빈(玉觀彬)형제 처단
  • · 이용로(李容魯)처단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경상북도 영양군(英陽郡) 영양면(英陽面) 대천리(大川里) 출신이다. 이명으로 엄순형(嚴淳亨)을 사용하였다. 호는 추수(秋水)이다. 1936년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31세로 1906년생으로 추정된다. 1924년 경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나섰다. 1929년 7월 북만주 하이린(海林)에서 조직된 재만조선인무정부주의자연맹(在滿朝鮮人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담하였다. 당시 한인아나키스트들은 김좌진(金佐鎭)이 신민부(新民府) 군정파(軍政派)를 중심으로 공산주의자들과 맞서기 위해 조직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의 한 축을 이루었다. 이들은 한족총연합회의 관할구역 내에서 농촌자치조직을 활성화하는 한편, 학교를 설립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30년 1월 김좌진이 공산주의자들에 암살당하고 뒤이어 김종진(金宗鎭)마저 피살되었다. 또 그해 여름 홍진(洪震)·지청천(池靑天) 등의 민족주의자들이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을 결성하자, 1931년 10월 초순 만주를 떠나 상하이(上海) 난샹(南翔)에 도착하였다. 당시 상하이에서는 1930년 4월 유자명(柳子明)·장도선(張道善)·정해리(鄭海理) 등이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고 활동하고 있었으며, 만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동지들을 가입시키고자 하였다. 이후 유자명과 창얼캉(常爾康)이라는 학생의 도움을 받아 난탕(南唐)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이때 유자명의 영향을 받으면서 아나키즘 이념을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1932년 12월 중순 프랑스 조계 복이리로(福履理路) 정원방(停元坊) 6호의 백정기(白貞基)의 집에서 원심창(元心昌)의 주선으로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였고, 1933년 3월 중국주재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有吉明)를 처단하고자 했던 ‘육삼정의거(六三亭義擧)’에 가담하였다. 1933년 2월 5일 백정기의 집에서 개최되었던 거사를 위한 논의 과정에 참석하였고, 다음날인 2월 6일 같은 장소에 모여 추첨으로 거사 담당자를 정하였다. 그리하여 3월 17일 수류탄 2개와 권총 2자루로 무장한 백정기와 이강훈(李康勳)이 육삼정에서 200m 떨어진 송강춘(松江春)이라는 식당을 거점으로 거사를 준비하던 중 일제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1933년 8월 1일 상하이지역에서 여러 사업을 통해 부를 이룩한 친일파 옥관빈(玉觀彬)이 독립운동가들을 무시하자 그를 처단하였다. 프랑스조계 영길리에서 자동차에서 내리던 옥관빈을 권총으로 즉사시켰다. 이 사건은 ‘서간단사건(鋤奸團事件)’으로도 불리는데, 한인애국단을 이끌던 김구(金九)와 정화암(鄭華岩)이 합의하여 결행한 거사로 알려져 있다. 1935년 1월 21일 정화암으로부터 권총 1정을 건네받아 이달(李達)·김지강(金芝江)·이규창(李圭昌)과 함께 원창공사(元昌公社)를 운영하던 조상섭(趙尙燮)의 집을 습격하여 그의 처로부터 백삼(白蔘) 70근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징수하였다. 한편 1935년 3월 25일에는 상하이 조선인거류민회(朝鮮人居留民會) 부회장 이용로(李容魯)를 처단하였다. 거사 당일 이규창과 함께 적사위로(狄思威路) 유신리(裕新里) 16호를 습격하여 이용로에게 권총 2발을 발사하였다. 그러나 이용로의 처 박성신(朴聖信)이 완강하게 저항하고, 이웃집에 거주하는 박숭복(朴崇福)이 합세하자, 근처 야채시장에서 망을 보고 있던 이규창이 달려와 현장에서는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중국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일주일 뒤 상하이 일본영사관경찰에 인도, 국내로 이송되었다. 1936년 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강도미수죄, 살인죄 등으로 사형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그해 4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1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당해 사형이 확정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1938년 4월 9일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상하이에서 인천으로 압송되는 배 위에서 이미 사형을 각오하고 있었는지 “민족의 해방을 위해 많은 반역도들을 처단했으니 자신의 한 몸 죽는다 해도 아무 여한이 없다”고 말하면서 의연한 태도를 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사형을 집행한 형리의 말에 의하면 ‘형장으로 나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조금도 당황하거나 초조해하는 빚을 보이지 않았으며, 마지막으로 ‘대한만세’, ‘무정부주의 만세’를 삼창했다고 전해진다. 사형 소식이 전해지자 남화한인청년연맹의 기관지 『남화통신』에 실린 이달(李達)의 「동지(同志) 엄순봉을 곡(哭)함」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자유의 대가는 피와 눈물이다. 그대는 자신의 피와 눈물로써 인류의 구생사(求生史)를 물들였고, 다가올 자유의 씨를 뿌렸다. 그 자유의 꽃이 피는 날에 만악(萬惡)의 현 제도는 그 유해조차 남기지 못하리라”라고 기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황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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