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규용
孫奎鏞1885. 2. 10 ~ 1950. 8. 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8)
관련 사건
- · 북청군 양화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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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8) 1885년 2월 10일 함경남도 북청군(北靑郡) 양화면(陽化面) 호만포리(湖滿浦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양화면에 소재했던 사립용연학교(私立龍淵學校)의 교사로 3월 16일 호만포리에서 학생들과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평양(平壤)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함경남도 북청군에는 3월 8일경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다. 독립선언서는 천도교도를 통해 북청군 내 각 면으로 배부되었다. 북청군에서는 독립선언서가 전달되면서 곧바로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3월 8일 오전 9시경 노덕면(老德面) 북청 읍내 부근의 동덕산(東德山) 산상에서 약 250여 명의 주민들이 모여 태극기를 세우고 종과 북을 울리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노덕면의 만세운동은 3월 13일까지 이어졌다. 이후 덕성면(德城面)·신창면(新昌面) 등 북청군 내 각 면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양화면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손규철(孫奎哲)은 고종의 장례를 보기위해 상경(上京)했다가 민족대표의 독립선언 발표와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독립신문」 2매를 가지고 3월 10일 호만포리로 귀향하였다. 「독립신문」에는 만세운동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으며, “조선민족은 그 취지에 찬동하여 분투”하자는 하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손규철은 곧바로 손정한(孫政漢) 등 마을 주민들에게 민족대표의 독립선언, 서울에서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전개한 것 등을 전달하며 「독립신문」을 배부하였다. 3월 14일 손규철에게서 서울의 만세운동 상황을 전해 들었다. 아울러 손병희가 ‘대통령’과 동일한 세력을 가졌으며, 한국 전 국토를 좌우할 만한 인물이라는 것, 한국인 경찰관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고 들었다. 이에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한국 독립에 일조하기로 하였다. 3월 16일 오전 10시경 용연학교 강당에 학생 약 35명을 모이도록 하여 가지고 있던 태극기를 가리키며 “이 국기는 한국 건국 이래 사용해 온 것이다. 그런데 10년 이전부터 일본 국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곧 조선이 독립하여 다시 이 국기를 사용할 수 있는 기운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므로 독립운동의 방법으로써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주도하였다. 이로써 학생 모두에게 만세운동 동참을 이끌어내고 용연학교 운동장에서 함께 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5월 5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6월 1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만세운동을 전개한 것은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근거하여 발동한 것으로 범죄가 아님”을 주장하며 상고하였다. 그러나 그 해 7월 2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함흥감옥(咸興監獄)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0년 4월 28일 사면령으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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