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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배호

成培鎬

1889. 12. 25 ~ 1944.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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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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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牙山)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아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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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16)

관련 사건

  • · 광천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6) 1889년 12월 25일 충청남도 아산군(牙山郡) 선장면(仙掌面) 죽산리(竹山里)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으로 성창여(成昌汝)를 사용하였다. 1919년 당시에는 홍성군(洪城郡) 광천면(廣川面) 옹암리(瓮岩里)로 이주해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광천면 만세시위 준비를 위해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배포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광천면 만세운동은 이명종(李鳴鍾)·박원식(朴源植)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평소 독립의 희망을 가지고 있던 이명종은 3월 6일 박원식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이때 서울에서 귀향한 박원식의 동생 박세화(朴世和)로부터 「독립선언서」와 함께 서울의 독립만세운동 소식을 전해 들었고, 이들과 함께 광천면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이명종은 박원식과 논의하여 만세시위 준비 작업으로 우선 광천면의 주민들에게 만세운동의 취지를 알리기로 하였다. 이들은 박세화로부터 전달받은 「독립선언서」의 내용을 3월 8일 양지(洋紙) 2장에 필사하여 각각 1장씩 광천시장과 옹암리에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벽보로 게시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에게 벽보가 바로 발각되면서 탈취를 당해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이에 이들은 광천시장의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결정하고, 보다 효율적으로 만세시위를 준비하기 위해 동지 규합에 노력하였다. 이때 이명종과 박원식으로부터 광천면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제안받고, 최응모(崔應模)·오인섭(吳仁燮) 등과 함께 동지로 결합하였다. 이들과 논의하여 「독립선언서」의 내용을 보다 효율적이면서도 더욱 많은 주민들이 읽고 내용을 알 수 있도록 필사 대신 등사(謄寫)하는 인쇄 방식을 선택하고, 짧은 시간에 등사를 끝낼 수 있도록 내용도 간략하고 쉬운 문장으로 바꾸도록 결정하였다. 「독립선언서」의 취지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내용을 쉽고 간략하게 고치는 것은 서승태(徐承台)가 담당하였다. 서승태가 다듬어 쉽고 간결하게 정리된 문안이 작성되자 3월 18일 이명종·박원식·최응모 등과 함께 오인섭의 자택에서 모여 「독립선언서」 약 510장을 등사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이명종·최응모 등과 함께 광천리와 옹암리 일대에 인쇄물을 배포하였지만, 이 일이 발각되어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광천면에서는 3월 21일과 4월 5일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일제 경찰의 조사과정에서 「독립선언서」의 배포 및 만세시위를 모의한 사실이 인정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같은 해 6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의 일부가 취소되었으나, 1심과 동일한 징역 1년을 받았다. “자신의 행동은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기초한 의사 발동이기 때문에 범죄가 아니다”라는 취지로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 해 8월 16일 고등법원에서 이유 없음으로 최종 기각되었다. 공주감옥에 수감되어 옥고를 겪었고, 1920년 4월 27일 ‘은사’를 통해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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