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삼규
白三圭1854 ~ 1920. 6. 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독립단
- · 기원독립단
포상 정보
- · 독립장(196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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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8) 평안북도 태천군(泰川郡) 동읍내면(東邑內面) 평산리(平山里)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920년 당시 66세인 것으로 보아 1854년생으로 추정된다. 호는 온당(溫堂)이고,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백삼규(白三奎)를 사용하였다. 유생으로, 박문일(朴文一)의 문인이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유인석(柳麟錫)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간도와 연해주 지역에서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이후 만주로 건너갔고 환런현(桓仁縣) 대아하(大雅河) 부근 취리두(臭里頭)로 이주하여 다음 해인 1911년 싱징현(興京縣) 평정산(平頂山)으로 가, 한인 자제 교육을 하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유인석이 사망한 후, 1917년 유인석의 유지를 받아 『의암집(毅菴集)』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1918년 콴뎬현(寬甸縣)에 거주하며 농무계·향약계·수의계 등을 조직하여, 한인의 정착 생활을 도우면서 청년들을 모아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1919년 4월 15일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부총재로 선임되었다. 대한독립단은 펑톈성(奉天省)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박장호(朴長浩)·조병준(趙秉準)·전덕원(全德元) 등을 중심으로 만주에 흩어져 있던 의병 계열 인사 560명이 기존 단체를 해산하고 조직한 단체였다. 대한독립단은 국내외 100여 곳에 지단과 지부를 설치하고자 하였다. 만주에는 100호 이상을 구(區)로 하고, 관구(管區)를 두어 10구마다 단장으로 하여 자치 행정을 실시하게 하였다. 환런을 비롯하여 창바이(長白)·푸쑹(撫松)·린장(臨江)·콴뎬 등 10곳에 지단(支團)이 설립되었다. 각 지단에는 재무부를 두고, 각 지역의 부유한 한인에게 15원에서 25원정도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국내에는 만주 지역 독립군단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국내조직을 설치하였다. 1919년 말 대한독립단 내부에서는 연호를 두고 단기(檀紀) 혹은 융희(隆熙)를 사용하자는 세력과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하자는 두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이들은 기원파(紀元派)와 민국파(民國派)로 나뉘어, 각각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과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이 되었다. 이때 기원독립단의 부총재로 선임되었다. 1920년 콴뎬현 고량지(高糧地)에서 송여관(宋汝官)에게 향약단에 가입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에 송여관이 붙잡히자, 1920년 3월 콴뎬현 지사와 관리에게 향약단을 보호해달라는 취지의 공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1920년 5월 일제 군경과 중국 군벌의 공동 수색 당시 제자인 김덕신(金德新)과 피신하였다. 같은 해 6월 7일 일본군 부대장 이타모토(板本)가 부대를 이끌고 콴뎬현 향로구(香爐溝)에 있는 청년단을 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김덕신과 함께 청산구(靑山溝)로 갔다가 붙잡혀 환런현 사첨자(沙尖子)에서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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