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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연

宋京燕

1894. 7. 2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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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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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용강(龍岡)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용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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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17)

관련 사건

  • · 황주군 송림면 겸이포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7) 1894년 7월 2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다미면(多美面) 서적리(瑞赤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황해도 황주군(黃州郡) 송림면(兼二浦面) 겸이포 화석정(,花石町, 현 송림시) 미쓰비시(三菱)제철소의 도면계(圖面係) 직원으로, 3월 3일 겸이포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과 평양(平壤)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직후 황해도 황주군에도 최창룡(崔昌龍)에 의해 독립선언서 10장이 전달되었다. 3월 2일 천도교인들은 황주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이 날 오후 2시경 황주읍내에 독립선언서가 붙여졌으며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장터에 모인 사람들이 만세를 외쳤다. 이튿날 송림면에서도 천도교도와 노동자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월 3일 월요일은 고종의 장례식이 있었던 날이기 때문에 일제 경찰의 경계가 강화되었다. 늦은 저녁 천도교도 약 30명이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안태직(安泰稷) 등이 김정하(金貞夏) 집에 찾아와 태극기 2기를 꺼냈다. 안태직은 “우리 조선도 자결론에 따라 독립되는 것이니, 우리 민족의 의무를 표해야만 한다”고 말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아울러 이병건(李炳建)에게 칠성여관(七星旅館) 김두섭(金斗燮) 집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져오도록 하여 “민족자결에 의해 조선도 확실히 독립을 할 수 있으니 독립만세를 같이 부르자”며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제안하였다. 당시 미쓰비시제철소에 근무하고 있었던 김정하의 집에서 제철소 직원들이 함께 기숙하고 있었는데, 이때 동료와 함께 안태직 등의 제안을 받아들여 만세운동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겸이포장로파교회당(兼二浦長老派敎會堂)에 모여 기독교도에게 동참을 요청하였으나 동의를 구하는 데 실패하였다. 이에 밤 9시경부터 10시 30분경까지 천도교도 30명이 교회당 부근의 큰 길에서 ‘한국독립만세’를 외치며 동지를 규합하는 등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한국인 노동자 약 200명이 이에 호응하며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에 일제 경찰이 주도자 9명을 체포하고 해산을 명령하였다. 만세운동 탄압 현장에 있었던 일본인 소방대원들은 만세시위를 기독교도들의 행동으로 오인하고 장로교회로 몰려가 유리창을 깨고 난로, 교회 종 등 기물을 파손하였으며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이 때문에 일본인 2명도 체포되었다. 이후 동료와 함께 겸이포경찰관주재소에서 조사를 받은 후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옮겨져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19년 5월 3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조선 민족 대표의 독립선언서에 의해 4,000여 년 역사를 이어온 2,000만 생명이 자유, 자치의 민족임을 확신하고 조선 민족의 하나로써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하기에 국민으로서 기쁜 나머지 경하의 뜻을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은 “인류사회의 안녕질서 유지에 비추어 불법행위가 없었음”을 주장하며 상고하였다. 그러나 7월 5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옥고를 겪고 1920년 4월 28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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