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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흠

白光欽

1895. 5. 11 ~ 1927.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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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백광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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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동래(東萊)계몽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동래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대동청년당
  • · 조선노동연맹회
  • · 조선공산당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조선공산당 제2차 검거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5년 5월 11일 경상남도 동래군(東萊府) 동래면(東萊面) 복천동(福泉洞, 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에서 태어났다. 1909년 10월 남형우(南亨祐)·안희제(安熙濟)·서상일(徐相日)·박중화(朴重華)·신백우(申伯雨)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4년 사립 동명학교(東明學校, 현 동래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청년운동·노동운동·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등 본격적인 민족해방운동에 나섰다. 1921년 무렵 결성된 동래 지역 최초의 청년단체인 동래청년구락부에서 활동하였으며 1922년 동래청년구락부가 동래청년회로 전환된 후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1924년 사회주의 청년단체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이 결성된 후 각 지역에도 기존 청년회의 혁신과 아울러 청년연맹 결성이 단행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25년 동래지역에서도 16개의 청년단체들이 연합하여 동래청년연맹을 조직하였는데, 이때 창립준비위원과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단체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외 조선일보사 동래지국장으로서 1925년 4월 15일 서울에서 개최된 전조선기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22년 1월 사회주의 청년운동의 일환으로 김한(金翰)·김달현(金達鉉)·진병기(陳秉基) 등과 함께 무산자동지회(無産者同志會)를 조직하였다. “동일한 사회운동에 뜻을 두는 사람만이 회합하여 무산자 계급의 생존권을 확립한다”는 목적으로 창립된 무산자동지회는 한국 최초로 무산자 혁명 목적을 명확하게 내 건 단체로서 이후 사회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감시로 제대로 된 활동조차 하지 못한 채 두 달 후 신인동맹회(新人同盟會)와 통합하여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로 전환되었고 그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노동운동 방면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대 초 화요회(火曜會)의 중진으로서 조선노동공제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내부 갈등으로 1922년 10월 조선노동공제회를 이탈하여 조선노동연맹회(朝鮮勞動聯盟會) 창립을 주도하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4년 2월에는 사회주의 청년단체인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 결성에 참여하고 청년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기 위해 전국 강연에 나섰다. 같은 해 4월 창립된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에서는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어 전국적으로 일어나던 각종 노동쟁의, 소작쟁의에 적극 개입하며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였다. 1925년 4월에는 경남 지역 사상단체 동인회(同人會)의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동시에 서울에서 조직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참여하여 이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26년 6·10만세운동 준비 과정에서 조선공산당 조직이 드러나면서 강달영(姜達永)·권오설(權五卨) 등 당원 170여 명과 함께 경찰에 붙잡혔다. 예심이 진행된 약 1년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다. 1927년 9월 비로소 재판이 시작되었지만 이미 신체와 정신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된 상태였다. 당시 경찰은 구체적인 범죄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심결정서에는 혐의 사실이 누락되어 있었다. 이에 변호인 측에서 기소의 부당함을 들어 석방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후 1927년 10월 13일 석방 당시 이미 결핵, 늑막염, 복막염 등 각종 질병으로 위중한 상황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동래 칠산동(漆山洞)의 친구 집에서 요양 겸 치료를 받던 중 회복하지 못하고 1927년 12월 13일 오전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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