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康來
康來1891. 11. 16 ~ 1967. 2. 1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흥업구락부 사건
- · 조선어학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1년 11월 16일 충청북도 충주(忠州)에서 아버지 이병무와 어머니 연안 이씨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화여(和汝), 호는 추정(秋汀)이다. 교사로 활동하면서 흥업구락부와 조선어학회에 참여하여 한글을 지키고 민족의식 함양에 기여한 교육자이자 어문민족운동가이다. 1909년 3월 안성공립보통학교 3학년을 수료한 뒤 상경하여 1910년 12월 공업전습소 도기과(陶器科)에 입학하였으나 1910년 12월 중퇴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1년부터 3년 간 북간도 옌지(延吉)에서 나철(羅喆),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李相卨) 등과 함께 항일운동을 펼쳤다. 옌지에서 이주 동포들에게 한글을 가르친 것을 계기로 한글을 통한 민족운동을 다짐하였다. 1915년 4월부터 1917년 10월까지 일본사범학회 본과에서 수학하였다. 일본에 유학할 동안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대상이 되었다. 귀국 후 서울과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종로경찰서에 구금되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개성 정화여자보통학교에서 처음 교사를 지낸 뒤, 1920년 10월 윤치호가 설립한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로 옮겨 6년 간 교편을 잡다가 계속되는 동맹휴학 등으로 1927년 3월에 퇴임한 후 같은 해 4월 배화고등여학교 교원으로 취임하였다. 1927년 12월 조선어연구회에 참여하여 한글 계몽활동을 전개하였고, 1932년 『한글』 창간호 발간에 참여하였고 조선어강습회 강사를 역임하였다. 1935년 1월에 조선어학회 산하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 사정위원으로 선출되어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확정하는데 노력하였다. 그 사이 1933년 3월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 다시 임용되어 재단법인 실행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34년 개성 춘기 한글강습회에 강사로서 강연하였다. 1936년 4월 다시 배화고등여학교 교사로 왔고,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 활동을 지속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2월부터 사상범 보호관찰대상자로서 매월 남산 순화 교육대에 불려갔다. 배화여고 교사 재직 중인 1938년 6월 흥업구락부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경찰서에 구금되었고 그해 9월 풀려났다. 일제의 강요에 의해 교사 사직서를 썼으나, 학교 측의 배려로 습자 강사로 일시 출근하였다. 1942년 「우리말큰사전」 편찬에 참여하였다가 10월 22일 일명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에 붙잡혀 11개월 간 투옥되었고, 1943년 9월 기소유예로 출감하였다. 충북 제천 박달재 근처 시골집으로 낙향했다가 광복 후 상경하였다. 광복 후 배화여고 교장, 경복고교 교감으로 봉직하다 정년 퇴임하였고, 한글학회 이사로서 한글 강습과 보급, 우리말 도로 찾기 등 한글 발전에도 힘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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