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식
宋基植1878. 9. 25 ~ 1949. 3. 2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동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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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78년 9월 25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하면(臨河面) 송천동(松川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천(鎭川)이다. 1919년 3월 18일에 일어난 안동군 안동 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난 소식을 듣고 크게 고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동면(臨東面) 박곡동(朴谷洞)에 사는 유동봉(柳東鵬)과 안동의 유림들을 규합하여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비밀리에 주도자들을 만나 여러 차례 논의한 끝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3월 18일 안동면 장날에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결의하였다. 거사 날짜를 정한 후 만세시위에 쓸 태극기를 만들고, ‘대한독립’이라고 쓴 깃발도 제작하였다. 또한 만세시위에 동참할 사람들을 모으던 중 안동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측에서도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연합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기독교측에서 호응하면서 두 세력이 힘을 합쳐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실행하게 되었다. 이때 안동교회의 김병우(金炳宇)·김원진(金元鎭)을 만나 거사 당일의 구체적인 일정을 논의하고, 협동학교(協東學校)와 보문의숙(寶文義塾)·동화학교(東華學校)의 교사와 학생들의 동참도 이끌어냈다. 1919년 3월 18일, 태극기와 깃발을 몰래 숨기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안동면으로 향하였다. 읍내 장터에 도착하여 장꾼과 주민들에게 태극기와 격문을 나누어 주며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제의하였다. 낮 12시경 계획한 대로 삼산동(三山洞) 곡물전에서 기독교도 30여 명이 먼저 ‘독립만세’를 부르며 달려 나왔다. 이들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남문통과 북문통을 오가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기다리고 있던 유림계 주도자들도 동문통에서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나왔다. 이때 선두에 서서 깃발을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대를 이끌었다. 두 세력이 합세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면서 장터 안에는 만세소리로 가득 찼다. 많은 군중들의 호응과 참여로 만세시위 열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 갑자기 출동한 일제 경찰이 시위대를 막아섰다. 일제 경찰은 총칼로 시위대를 위협하며 강제로 해산시켰고, 주도자들을 붙잡았다. 이후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대는 3월 19일 새벽까지 군청과 경찰서,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으로 가서 투석전을 벌이며 만세시위를 벌였고, 새벽 1시경 일제 수비대가 총탄을 발포하면서 모두 해산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4월 7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하면서 “독립만세를 부른 것은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의 보안을 위한 것이며 더 나아가 동양의 평화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보안법 위반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민족을 위하여 독립만세를 부른 자신에게 징역을 부과한다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한 윌슨에 대해서는 징역 10년을 선고해야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변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같은 해 6월 5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면서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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