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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한조

孫漢祚

1892. 4. 16 ~ 1953.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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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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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도(淸道)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청도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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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청도군 운문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2) 1892년 4월 16일 경상북도 청도군(淸道郡) 운문면(雲門面) 신원동(新院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손장현(孫長鉉)을 사용하였다. 1919년 당시 운문면에 위치한 사립학교인 문명학교(文明學校)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운문면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청도군 운문면의 만세운동은 문명학교 출신들이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일, 고종(高宗)의 장례에 참가하기 위해 문명학교 졸업생 김상구(金相久)와 김종태(金鍾台)가 서울에 갔다가 만세시위를 목격하였다. 두 사람은 청도로 돌아와 3월 10일, 신원동에 위치한 문명학교 교장 김우곤(金禹坤)의 집에서 여러 청년들에게 서울의 만세 시위에 대한 소식을 전하였다. 모인 이들은 청도에서도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결의하고, 3월 15일 손기현(孫琪鉉)과 김재화(金在華) 등이 ‘대한독립만세’가 적힌 격문 20장을 만들어서 운문면 주요 장소에 부착하였다. 이때 격문 부착 사건에 연루되어 김진효(金鎭孝)·김상구·김종태·강재식(姜在植) 등과 함께 3월 18일 대천동(大川洞) 운문주재소(雲門駐在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조사가 끝난 후, 동료들과 함께 대천리(大川里)에 있는 임봉서(林鳳棲)의 집에서 점심을 먹던 중 홍해성(洪海性)과 김진효 등의 제안에 따라서 3월 18일 당일에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이들은 만세시위를 펼치기 위해 가장 먼저 운문면사무소로 향했다. 김종태는 2척 정도 길이의 명주 수건에 ‘대(大)’자 한 글자를 먼저 써넣었다. 이어서 김진효는 면서기 백상열(白庠烈)·최현규(崔鉉奎)·이용환(李龍煥)·김경수(金景洙) 등 4명에게 ‘한(韓)’, ‘독(獨)’, ‘립(立)’, ‘만(萬)’을 한 자씩 쓰도록 하였다. 남은 한 글자 ‘세(歲)’는 다른 주도자 중 한 명이 완성하였다. 주도자들은 완성한 깃발을 들고 면사무소를 나와 김진효의 개회와 선창에 따라서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외쳤다. 다음으로 운문면 면장 이영호(李永浩) 집으로 행진하여 다시 만세를 불렀다. 이 때, 임봉서(林鳳棲)와 이용환(林鳳棲) 등도 함께 합세하였다. 이영호가 만류했지만, 운문면 곳곳을 다니면서 만세를 외치자 마을 곳곳의 청년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시위는 밤까지 이어져, 방음동(芳音洞)·오진동(梧津洞) 등에서도 일어났다. 이 시위가 일어나자 3월 20일, 대구(大邱) 일본군 헌병 분견대에서 헌병 3명과 청도경찰서 서장 등 5명이 운문면으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펼쳐 주도자들을 가려내어 끌고 갔는데, 이때 주도 인물로 지목되어 동료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5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그 해 7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으로 줄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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