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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필규

孫弼奎

1870. 7. 20 ~ 1938.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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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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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論山)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논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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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3월 12일 논산읍 만세시위
  • · 1938년 2월 천도교의 무인년 기도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70년 7월 20일 충청남도 논산군(論山郡, 현재의 論山市) 은진면(恩津面) 남산리(南山里) 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고, 본인 소유의 논 20두락을 통해 중류층 이상의 생활을 향유하였다. 일찍이 천도교(天道敎) 에 입문하여 활동하였고, 1918년부터 천도교의 논산 교구장을 맡았다. 1919년 3월 12일의 논산읍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1938년 천도교의 멸왜기도사건 , 이른바 ‘무인년 기도사건’으로 붙잡혀 일제 경찰에 의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1919년 논산의 만세운동은 「독립선언서」를 충남의 다른 지역으로 전파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된 바로 다음날인 3월 2일 오후 6시경 전북 익산(益山)의 함열(咸悅) 천도교구에서 파견된 민영순(閔泳淳)이 40매씩 묶인 「독립선언서」 2묶음을 소지하고 논산의 천도교구에 도착하여 교구에 주재하고 있던 김태호(金泰昊)와 이백순(李伯純)에게 전달하였다. 이것은 충남 지역에 처음으로 배포된 「독립선언서」였다. 이를 가져온 민영순은 김태호와 이백순에게 “우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한다”는 「독립선언서」의 주요 내용이 교주 손병희(孫秉熙)의 뜻임을 밝히고, 이 중 「독립선언서」 1묶음을 충남의 주요 교구 중 하나였던 부여(扶餘) 교구에 전달할 것과 나머지 1묶음은 논산 교구의 각 소에 배포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김태호와 이백순은 즉시 민영순의 의뢰를 승낙하고 역할 분담을 통해 「독립선언서」를 배부하였다. 논산 교구의 각 소에 배포하는 것은 이백순이 담당하고, 김태호는 40장의 「독립선언서」 1묶음을 가지고 곧장 부여로 출발하여 오후 9시경 부여의 천도교 교구실에 전달하였다. 이후 논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은 3월 12일이었고, 천도교도를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논산 교구장으로서 논산의 천도교도들에게 3월 1일 이후 서울에서부터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의 취지와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을 전달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논산의 만세시위를 조직하였다. 김태호·이백순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하여 3월 12일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날 강경면(江景面, 현재의 江景邑) 주민들과 학생 100여 명을 규합하여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이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고, 이들을 지휘하여 시위대열을 갖추고,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논산 읍내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만세시위대가 행진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외치는 ‘대한독립만세’의 구호에 공감한 논산의 주민들이 속속 만세시위에 동참하여 만세시위대는 1,000여 명의 규모로 확대되었다. 이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읍내의 곳곳을 행진하였다. 논산 읍내에서 대규모의 만세시위 발생하자 곧바로 일제 헌병대가 출동하여 만세시위를 중지하고 즉각 해산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이를 무시하고 더욱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지속하였다. 이에 일제 헌병대는 비무장으로 평화시위를 전개하고 있던 만세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인 총기 발포로 대응하며 시위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때 만세시위대의 선두에서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염중오 등이 일제 헌병의 무자비한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헌병에 붙잡혀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검찰에 송치되었으나, 1919년 3월 31일 대전지검 공주지청으로부터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이 내려져 풀려났다. 풀려난 직후인 4월 천도교 중앙총부로부터 “조선의 독립에 대한 운동비를 모집하라”는 지시를 받고, 논산 교구의 천도교도들을 상대로 운동비를 모금하였다. 모금 운동을 통해 조성된 150원을 가지고 5월 2일 서울로 가서 중앙총부에 이 금액을 납부하였다. 이로 인해 서울의 헌병분대로 끌려가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여러 차례 조사받았다. 독립운동의 자금을 조성하여 천도교 중앙총부에 납입한 것에 대해 집요하게 조사를 받았으나, 매년 납부하는 특별성미금(特別誠米金)이라고 주장하여 이때에도 구속의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이후 일제의 사찰대상이 되었다. 1936년부터 당시의 천도교 교주 박인호(朴寅浩)의 지도에 따라 논산 교구 차원에서 ‘멸왜기도운동’에 참여하여 실천하였다. 멸왜기도운동은 천도교에서 동학(東學) 즉 천도교의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지은 「안심가(安心歌)」를 변형하여 “개 같은 왜적놈을 한울님께 조화받아 일야간에 소멸하여”라는 구절이 삽입된 식고문을 식사 전에 암송하는 생활운동이었다. 1937년 이후로는 일제의 탄압을 방지하기 위해 “동양평화의 기초가 하루라도 속히 확립되기를 기원합니다”라는 문구를 추가하였으나, 1938년 2월 황해도(黃海道)에서 일제 경찰에 멸왜기도운동이 발각되었다. 일제 경찰은 이 사건을 ‘무인년 기도사건’으로 규정하고, 전국적으로 관련된 천도교도들을 체포하면서 강력한 탄압정책을 폈다. 이때 논산의 천도교도들에 대해 ‘멸왜기도운동’을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인하여 1938년 8월 15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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