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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樂三

白三

1891. 7. 7 ~ 1934.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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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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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안(咸安)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함안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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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함안군 함안읍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1년 7월 7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가야면(伽倻面) 말산리(末山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백성수(白性壽)를 사용하였다. 1919년 3월 19일 경상남도 함안군 읍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함안 지역 만세운동은 3월 9일 칠북면(漆北面) 이령리(二靈里) 연개장터 의거를 시작으로 3월 12일과 3월 17일 대산면(代山面) 평림장터 시위, 이튿날인 3월 18일 칠서면(漆西面) 이룡리(二龍里) 시위를 거쳐 3월 19일 함안면 읍내 만세시위, 3월 20일 군북면 시위로 절정을 이루었다. 그 계기는 고종(高宗) 국상에 참여하기 위해 올라간 지역 인사들이 3월 5일 내려오면서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알린 것이었다. 이들은 안지호(安知鎬)·곽종한(郭鍾漢)·이희석(李喜錫) 등 지역 인사들과 함안 읍내 만세시위 계획을 논의하였는데,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 자리에서 함안 읍내 장날로 사람들이 많이 모일 것으로 예상되는 3월 19일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만세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나눠 줄 태극기, 독립선언서 등 준비물 제작, 군중 동원을 위한 연락망 구축 등 역할 분담을 하였고, 거주지인 가야면의 동지 규합과 군중 동원을 이희석(李喜錫)과 함께 담당하였다. 시위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장꾼으로 가장하여 읍내 장터에 모이도록 하였다. 3월 19일 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비봉산(飛鳳山) 고천제(告天祭)에 참가하였다. 이후 읍내 중심지인 봉성동(鳳城洞)에서 수백 명이 모인 가운데 시작된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시위대가 만세를 부르면서 함안 경찰관 주재소, 함안 군청으로 나아갈 때 선두에서 지휘하였다. 장날 모인 사람들이 가세하면서 만세운동에 참가한 군중은 3천 명까지 불어났고, 일제 군경의 폭력적 진압에 맞서 적극적인 행동을 보였다. 시위대를 지휘하여 주재소·군청·법원출장소·우체국 등에 들어가 집기와 서류를 파손하였으며, 관계자들을 붙잡아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하였다. 이때 시위대에게 입고 있던 제복을 찢기고, 만세를 부르도록 강요받았던 함안 군수 민인호(閔麟鎬)가 재판 과정에서 주도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지목하기도 하였다. 만세시위가 거세지고 참여 군중이 늘어나자 일제 경찰은 일본군 수비대의 동원을 요청하였고, 마산의 중포병대대가 출동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진압하였다. 군대까지 동원된 상황에서 만세시위 군중은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시위가 진압되자 일제 군경은 이후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시작하였고, 이때 많은 사람들과 같이 붙잡혔다. 1919년 5월 2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여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8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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