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운
裵容雲1897. 12. 23 ~ 1950. 1.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5)
관련 사건
- · 의성군 비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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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05) 1897년 12월 23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비안면(比安面) 쌍계동(雙溪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2일 의성군 비안면 쌍계동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경북 의성 출신의 기독교도 김원휘(金原輝)는 3월 3일 평양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목격한 후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쌍계동 장로교회 목사인 박영화(朴永和)에게 서울과 평양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의성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주장하여 준비에 들어갔다. 한편 박영화의 아들이자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인 박상동(朴尙東)도 3월 10일 대구 학생 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독립선언서를 지닌 채 낙향해 독립운동 준비에 가담하였다. 이로써 기독교도와 학생을 주축으로 한 만세운동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김원휘는 3월 6~7일경 박영화·박영달(朴永達)과 함께 쌍계동과 안평면(安平面) 괴산동(槐山洞)의 교회당에서 모임을 갖고, 전국적으로 번져가는 만세시위의 소식을 전하며 자체적인 만세시위를 조직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들은 주민 중에서 거사에 찬동하는 동지를 모으고자 하였다. 이때, 거사 준비 소식을 듣고 최점문(崔占文)·박충식(朴忠植)·서금이(徐金伊) 등과 함께 계획에 동참하였다. 3월 12일 정오를 기해 만세운동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전달받고 거사 장소로 주민들과 함께 이동하여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12일 당일, 비안공립보통학교에서 시위를 마치고 합류한 학생들과 마을 주민 2백여 명은 정오 무렵 쌍계동 박영신의 집 앞 도로에 모였다. 시위 군중은 태극기를 들고 온 동네를 행진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을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를 향해 독립에의 의지를 당당하게 드러냈다. 집회는 시위대의 자진 해산을 통해 평화적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날 오후 4시 독립운동시위에 관한 급보를 받은 의성경찰서에서는 한국인 경부와 순사부장을 급파하여 비안 주재소 경찰과 함께 시위 주도자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여 붙잡았다. 이때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2일 대구지방법원 의성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고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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