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호
宋永祜1903. 7. 22 ~ 1968. 8. 2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건동맹단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제2차 유림단 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03년 7월 22일 경상북도 영주군(榮州郡) 장수면(長壽面) 호문리(好文里)에서 아버지 송인상(宋仁相)과 어머니 유하회(柳河回)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아우는 송재호(宋在祜)이다. 제2차 유림단 의거에 참여하였다. 7세부터 12세까지 집에서 한문을 배웠다. 12세에 영주공립보통학교(榮州公立普通學校)에 입학하여 1918년 3월 졸업하였다. 1920년 서울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5개월 만에 중도 퇴학하고 귀향하였다. 1924년 (음)2월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그 해 (음)7월 베이징 서성(西城)에 있는 베이징학원(北京學院) 중등과(中等科)에 입학하여 1925년 6월 졸업하였다. 졸업 직전인 1925년 4월 베이징 서성에서 김창숙(金昌淑)·김화식(金華植)·이봉로(李鳳魯)·권상수(權相洙) 등 영남 출신의 인사들을 만나 독립운동에 뜻을 같이하였다. 그리고 김창숙이 주도했던 제2차 유림단 의거에 참여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제1차 유림단 의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김창숙은 1925년 봄 베이징에서 이회영(李會榮) 등과 함께 네이멍구(內蒙古) 지역의 3만 정보(약 297,522㎢)를 개간하여 군사기지를 건설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를 위해 1925년 1월 군사기지 건설에 필요한 군자금 20만 원을 국내에서 영남 지역 유림을 대상으로 모집하기로 하는 등 구체적인 군자금 확보 계획을 세웠다. 1925년 6월 말 이 계획에 참여하기로 한 후 가장 먼저 국내로 잠입하여 서울에 거점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김화식의 국내 잠입과 권총 등 무기 반입을 돕기 위해 연락하는 한편, 김창숙과 김화식 두 사람의 귀국 여비와 권총 구입비용 600원을 송금하였다. 이리하여 7월 하순 김화식, 8월 중순 김창숙이 차례로 서울로 들어왔다. 김창숙은 경성부(京城府) 관훈동(寬勳洞)에 마련된 면우집간소(俛宇集刊所)를 중심으로 정수기(鄭守基)·손후익(孫厚翼) 등의 영남 유림을 만나 군자금 모집에 착수하였다. 1925년 9월 25일 김창숙과 김화식 두 사람을 만나 군자금 모집에 필요한 활동 비용 일체를 부담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즉시 고향 영주로 내려가 자신 소유의 토지 1천 두락을 매각하여 10월 중순까지 전후 4차례에 걸쳐 모두 560원을 김창숙에게 송금하였으며, 또 10월 하순 400원을 활동 자금으로 김창숙에게 송금하였고, 김화식의 활동 경비로 100원을 지급하는 등 모두 1,700원을 제공하였다. 1925년 10월 19일 경성부 낙원동(樂園洞) 134번지에서 김창숙·곽윤(郭奫)·김황(金榥)·손후익·하장환(河章煥)·이기병(李基炳) 등과 함께 신건동맹단(新建同盟團)을 조직하였다. 신건동맹단은 모험단(冒險團)과 모집단(募集團)으로 편성되었는데, 이때 김화식·정수기와 함께 모험단에 소속되어 권총을 휴대하고 모집단의 군자금 모집에 불응하는 부호에게서 강제로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총책임자는 김창숙이 맡았고, 김화식·정수기와 함께 실무 책임을 맡았다. 1925년 11월 상순부터 김창숙·김화식·정수기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을 협의하였다. 12월 상순 군자금 모집을 위해 대구(大邱) 지방에 내려간 김화식과 정수기의 소식이 끊어지자 직접 내려가 군자금 모집을 독려하는 등 동지들의 모금 상황 파악과 모금 활동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모금액은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하였고, 그 활동도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이에 김창숙과 함께 1925년 12월 말 직접 대구로 내려가 논의할 만한 유림들을 대구로 불러 들였다. 김화식·이영로(李泳魯)·김창백(金昌百)·이수기(李壽麒)·홍묵(洪黙)·이동흠(李棟欽)·이종흠(李棕欽) 등을 이끌고 대구 남산동(南山洞, 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신형익의 집에서 김창숙을 만나 활동 목표와 지침을 들었다. 그리고 군자금 모집에 불응하는 부호들에게는 무력을 행사하기로 함께 결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직접 모금 활동에 나서 대구의 권상경(權相經)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영주 일원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1926년 1월 30일 군자금 모집을 직접 지휘하던 김창숙이 손후익을 만나기 위해 울산(蔚山)으로 향하던 중, 경남 언양(彦陽)에서 자동차 사고로 허리를 크게 다쳤다. 김창숙은 손후익의 집을 비롯하여 울산의 이재락, 동래 범어사 금강암 등에서 치료를 받으며 모금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각처와의 연락은 끊어지고 모금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에 김창숙은 제2차 계획을 세우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기로 하였다. 1926년 3월 22일 김창숙은 부산발 베이징행 열차를 타고 3월 23일 서울에서 하룻밤을 묵은 다음 상하이로 돌아갔다. 3월 23일 서울에서 김창숙을 만나 김화식과 함께 국내에 남기로 하였다. 상하이로 탈출한 김창숙이 다시 거사를 도모할 경우를 대비해 김화식과 지속적으로 조직을 관리하며 국내에서 내응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김창숙이 상하이로 탈출한 직후부터 일제 경찰의 본격적인 검속이 시작되었다. 1926년 4월 2일 김화식이 잡히면서 관련자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가 시작되어 5월 중순까지 관련자 600여 명이 붙잡혔고 그 중 40~50명이 기소되었다. 1926년 4월 17일 은신해 있던 고향인 장수면 호문리 뒷산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곧이어 체포된 동생 송재호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본가로 돌아와 자결을 기도하였다. 김화식·손후익 등 28명과 함께 1926년 12월 2일 예심에 회부되었다. 1927년 1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첫 공판이 열렸다. 그 해 3월 15일 다시 공판이 재개되어, 3월 17일 징역 5년이 구형되었고, 3월 29일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