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위길
宋渭吉1909. 11. 24 ~ 1989. 8. 1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영주청년동맹
- · 신간회 영주지회
- · 영주농민조합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3)
관련 사건
- · 광주학생운동
- · 2차 영주격문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1993) 1909년 11월 24일 경상북도 영주군(榮州郡) 영주면(榮州面) 영주리(榮州里, 현 영주시 영주1동·영주2동 일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야성(冶城)이며, 이명은 송중섭(宋仲燮)이다. 영주에서 사회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영주청년동맹(榮州靑年同盟) 맹원, 신간회(新幹會) 영주지회 선전부 위원, 영주농민조합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영주지역에서 활발히 사회운동을 전개하던 중 1929년 11월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자 영주에서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당시 영주에서는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로 인해 영주청년동맹원들이 격문을 배포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무려 4차례나 전개된 ‘영주 격문 사건’은 일제강점기 영주지역 민족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영주청년동맹원들은 곧바로 사건 발생의 의의를 선전하고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강력히 투쟁할 것을 선동하는 유인물을 살포하였다. 영주청년동맹에서는 광주학생사건 발생 직후인 1929년 11월 13일 제6회 집행위원회를 열고 ‘광주학생충돌사건’을 자체적으로 조사하기도 하였다. 이후 1930년 2월 두 종류의 격문을 작성하여 배포하였으며 이로 인해 상당수의 청년이 검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잇달아 3~4월에 걸쳐 2~4차로 격문 살포가 계획 후 실행되었는데, 이때 이상을(李相乙)과 함께 ‘2차 격문 사건’을 주도하였다. 1930년 3월 16일 이상을과 함께 격문 인쇄에 대해 논의한 후 3월 18일 자신의 집에서 「만천하 피압박 대중에게 격(檄)함」이라는 제목의 격문 원고를 작성하였다. 이 격문에는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획득하자! 모든 악법을 철폐하자! 이른바 광주학생사건 피고들의 무죄를 주장하자!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조선총독 폭압정치에 항쟁하자! 투옥 동지를 탈환하자!” 등의 구호가 적혀 있었다. 이후 영주청년동맹 회관에서 시천교(侍天敎) 종무소(宗務所)에 있던 등사판을 가져와 격문 763매를 인쇄하였다. 이들은 1930년 3월 19~20일 사이에 김회길(金會吉)·김계진(金季鎭) 등의 동지를 규합하여 함께 격문을 살포하기로 하였다. 3월 24일 영주 장날 정오를 기하여 장터에 모인 군중들을 대상으로 격문을 살포하려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정회복(丁會福)과 함께 어시장(魚市場) 방면, 이상을과 김회길은 미시장(米市場) 방면, 박승헌(朴勝憲)과 김계진은 포목시장(布木市場) 방면으로 정하고 일제히 격문을 살포한 후 함께 만세를 부르자고 협의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구체적인 계획 수립에도 불구하고 거사 전날인 3월 23일 밤 일제 경찰에 모두 붙잡혀서 실패로 돌아갔다. 1930년 4월 23일 대구지방법원 4호 법정에서 열린 재판에서 이른바 출판법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변호사가 “격문 살포 이전에 검거되었으므로 출판법 위반은 맞으나 치안유지법 위반은 아니다”라고 강력히 주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치안유지법 위반이 적용되었던 것이다. 1931년 2월 25일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