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문익
孫汶翼1921. 9. 22 ~ 1948. 2. 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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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5) 1921년 9월 22일 경상북도 경주군(慶州郡, 현 경주시) 내남면(內南面) 용장리(茸長里)에서 양조장(釀造場)을 운영하던 아버지 손진호(孫晉皓)와 어머니 이언성(李彦聖)의 4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월성(月城)이다. 일제의 강요로 대원문익(大原汶翼)이라는 창씨명을 사용하였다. 고향의 내남공립보통학교에서 수학한 뒤 1937년 4월 대구공립농림학교(大邱公立農林學校, 현 대구농업마이스터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학년 때 기숙사에서 신문을 열독하면서 일본인과 한국인 간 심한 차별대우 등 사회 실상을 알게 되었고, 2학년 때 한글 소설을 섭렵하면서 민족의식이 강해져 “일본으로부터 우리나라를 독립시켜야 한국의 행복이 온다”고 인식했다. 일본어 상용에 반대해 1940년 4월과 9월, 이듬해인 1941년 3월 각각 동급생들에게 한글 습득을 강조하는 한편 한글소설 강독을 권유했다. 1940년 11월 자취방에서 학생 4명에게 「서울 노래」(조명암 작사, 안일파 작곡)를 가르치고, 1941년 5월 15일 학교 교정에서 여러 학생들과 이를 십여 차례 합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 해 6월, 학교 인근 김영식 방에서 학생 2명에게 우리말과 한글 사용, 한글소설 정독을 권유하였다. 같은 해 8월, 동생 손경익(孫景翼)이 대구사범학교 문예부 비밀결사 운동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12월 기소유예로 풀려나자 부득이하게 학생운동을 중단하였다. 1941년 12월 졸업 후 1942년 1월 27일부터 경주금융조합 서기로 근무하던 중 독립운동 활동이 탄로나 같은 해 8월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3년 8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미결구류일수 15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1944년 4월에 풀려나 약 1년 8개월 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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