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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景燮

景燮

1876. 11. 21 ~ 1924.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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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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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곡산(谷山)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곡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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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 · 3.1운동
  • · 곡산군 곡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876년 11월 21일 황해도 곡산군(谷山郡) 하도면(下圖面) 명탄리(鳴灘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에는 천도교 봉훈(奉訓)으로 곡산군 곡산면(谷山面) 적성리(赤城里)에 거주하였다. 심문조서에 “나는 무학으로 글자도 모른다. 선언서를 보아도 모른다”고 한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황성신문』 1908년 4월 16일 자에 보면 곡산군 낙영학교(樂英學校) 유지를 위해 후원금인 찬성보조금 모금에 군수 이하 지역 사회 유지인사들이 참여했을 때 이경섭도 2환(圜)을 기부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약간의 재산도 있는 유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15년 전부터 천도교인이다”라고 한 것으로 볼 때 1904년경 천도교인이 된 것으로 보이며, 임원은 아니라고 한 것은 중앙 교직자나 지역의 교구나 단위 교회 책임자는 아니라는 말로 보인다. 1919년 고종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2월 26일 곡산을 출발하여 다음 날인 27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에 오면 항상 머물던 천도교 신자 변종식(卞宗植)이 운영하는 송현동(松峴洞) 여인숙에 투숙하였다. 다음날인 2월 28일 오전 11시경 평남 천도교 신자 김명선(金明善)과 한 방에 있을때 『천도교 월보』과장이자 보성사(普成社) 사장인 이종일(李鍾一)이 방문하였다. 그리고 이종일이 독립선언서의 지방 배포를 부탁하자, 이를 승낙하였다. 이종일은 약 20분 뒤에 선언서를 흰 양지에 싸서 풀로 붙인 것을 가지고 와서 1,000장을 쌌다고 하면서 주었다. 이종일은 그중에서 700장 정도를 서흥(瑞興)의 천도교 신자 박동주(朴東周)에게 전달하여 해주(海州)·사리원(砂里院) 방면에 배포하게 하고, 나머지 300장은 수안(遂安)·곡산군에 배포해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가급적 속히 운반토록 하고, 천도교 신자와 비신자를 구분하지 말고 지방 주민들에게 배포해 달라고 하였다. 긴급을 요하는 이 사명을 위해 2월 28일 오후 8시에 바로 서흥군으로 출발하였다. 3월 1일 오전 10시 서흥군의 박동주 집으로 찾아가 750장 정도를 전달하였다. 그리고 그날 오후 8시경 수안에 도착해 읍내에 거주하는 천도교 신자 홍석정(洪錫禎) 집에서 숙박하였다. 그리고 홍순걸(洪淳杰)을 홍석정의 집으로 오라고 해서 홍순걸과 홍석정에게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왔다고 말하고 수안군에서 필요한 만큼 꺼내주었다. 이어서 자신은 발이 아파서 바로 곡산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나머지는 사람을 시켜 곡산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홍석정은 3월 2일 오전 3시경 130장쯤 되는 선언서를 곡산으로 보내기 위하여 떠났다. 그러나 90리나 떨어진 곡산에 홍석정 자신이 직접 갈 수가 없어 다른 사람을 보내고, 자신은 수안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여 3월 3일 수안 읍내 시위가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3월 2일 오전 7시경 곡산으로 가기 위해 수안을 출발하였으나, 발이 아파서 걸을 수 없어 40리쯤 와서 숙박하였다. 그리고 3월 3일 오전 7시에 다시 출발하였으나, 보행이 여의치 않아 곡산면 송정리에 도착한 다음 천도교 전교실에서 숙박하였다. 그날 송정리 전교실에 교인 약 30명이 모였다. 이미 홍석정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다음날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도록 연락이 되었고, 군내의 동지 전부가 곡산면에 집합하여 만세를 부를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곡산의 독립만세시위는 천도교인의 주도로 3월 4일 시작되었다. 오전 10시 천도교인 200여 명이 ‘조선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들고 독립만세를 높이 부르며 송항리(松項里)에서부터 대열을 정돈하여 읍내 큰 거리로 행진을 시작하였다. 주민들이 시위대열에 가세하자, 헌병대가 주도자 7명을 체포하였다. 이날 청계면과 서촌면에서는 각각 천도교 전교실에 교인들이 모여 만세를 부르며 읍내로 행진하다가 헌병대의 무력 제지로 해산하였다. 일제 경찰에 붙잡힌 뒤 재판에 회부되었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소요죄 등으로 징역 1년 6월(미결구류일수 중 360일 본형에 산입)을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1년 5월 5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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