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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세

孫永世

1880. 3. 18 ~ 1930.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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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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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慶北)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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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영덕군 영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0년 3월 18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영해면(寧海面) 묘곡리(畝谷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8일과 19일, 이틀에 걸쳐 영덕군 영해면·병곡면(柄谷面)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과 평양(平壤) 등 주요 도시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경북 영덕 지역에서는 서울에 다녀온 김세영(金世榮)이 주도하여 3월 중순부터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영덕군의 만세운동은 영해면과 영덕면(盈德面)에서 시작되어 병곡면(柄谷面)·지품면(知品面)·창수면(蒼水面) 등지로 확산되었다. 1919년 3월 12일 영덕군 만세운동 주도자 김세영은 지품면 낙평동(洛坪洞) 기독교회에서 권태원(權泰源)을 만나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채택하여 각 민족이 이미 독립국가를 건설하고 있다. 우리 조선 민족도 2명의 위원을 파견하여 민족자결주의에 근거하여 독립을 청원하였다”며 독립을 이루기 위해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과 파리장서운동에 대해 전달하였다. 이를 전해들은 권태원은 북장로교 기독교도인 정규하(丁奎河)와 함께 동지를 규합하여 영덕읍내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협의하였다. 이에 정규하와 남효직(南孝直) 등은 영해면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기독교도와 양반 등을 동지로 규합하는데 성공하였다. 정규하와 남효직(南孝直) 등은 3월 18일 영해면(寧海面) 성내동(城內洞)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영해면과 병곡면, 축산면(丑山面), 창수면의 기독교도, 권(權)·남(南)·박(朴)·백(白)·이(李)의 5성(姓)의 양반, 그리고 지역 유지들의 동참을 이끌어냈다. 이처럼 영덕군의 만세운동이 체계적으로 준비되고 있을 때 이상화에게서 만세운동 계획을 전해 듣고, 이에 찬성하여 김치운(金致雲) 등과 함께 묘곡리 마을 사람들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오후 1시 30분경 성내동(城內洞) 장터에 영해공립보통학교(寧海公立普通學校) 등 학생을 중심으로 구성된 100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군중은 주도자들의 만세 선창을 시작으로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정규하 등이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 이때 2,000여 명으로 증가한 군중과 함께 만세를 외치고 장터 주변을 열을 지어 행진하자 영해경찰관주재소 경찰들이 저지하며 해산을 명령하였다. 이때 경찰의 해산 명령에 응하지 않고 동지들과 함께 일본인 순사와 한국인 순사보를 구타하였다. 이어 영해경찰관주재소로 달려가 만세를 불렀다. 일본인 순사부장이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이에 불응하며 숙사 등 주재소 내외를 일부 파괴하기도 하였다. 이어 영해우편소, 영해면사무소, 영해재향군인분회, 소방조를 돌며 집기 등을 훼손하였다. 한편 영해공립심상소학교에 가서 교사와 학생들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하였다. 만세운동은 병곡면으로 확산되었다. 이때 성내동 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동지들과 함께 군중 일부를 인솔하여 병곡면으로 향하였다. 병곡으로 가면서 ‘한국독립만세’를 연호하고 도로 주변의 사람들을 만세운동에 참여시켰다. 400~500명의 군중과 함께 병곡동에 도착하여 병곡경찰관주재소, 병곡면사무소 부근에서 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면사무소의 집기와 건물 일부를 훼손하였다. 영해면의 만세운동은 이튿날도 계속되었다. 3월 19일 아침 성내동에 약 600~700명의 군중이 만세를 외치며 일대를 행진하였다. 오전 10~11시경 포항헌병분대와 보병80연대에서 20여 명이 급파되었다. 오후 5시 일제 군경이 포를 발사하여 군중을 해산시켰다. 영해면과 병곡면 일대에서 일제 군경에 의해 20여 명이 사상(死傷)당하였으며 250여 명이 붙잡혔다. 이처럼 영해면과 병곡면에서 군중을 이끌고 만세를 외치고 일제 관공서를 파괴하는 등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공무집행 방해죄, 상해죄, 건조물 손괴죄, 기물 손괴죄, 공문서 훼기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고, 그 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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