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만영
成萬永1875. 9. 23 ~ 1936. 8. 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3)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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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3) 1875년 9월 23일 경상남도 합천군(陜川郡) 초계면(草溪面) 초계리(草溪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1일 합천군 초계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합천군 만세운동은 고종 국상에 상경한 지역 유림과 서울에서 유학하고 있던 학생 등이 각각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내려온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3월 18일 백산면(栢山面)·상백면(上栢面)의 주민들이 주도한 삼가면(三嘉面) 읍내 시위를 시작으로 군내 각지에서는 거의 매일같이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원화(李源華)·전하선(全夏善)·김덕명(金德明) 등과 함께 3월 21일 초계면 장날에 일으킨 초계면 만세시위 역시 그 연속선상에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응축된 독립만세운동의 열기는 3월 23일 삼가시장 만세시위에서 폭발하였다. 합천군 전역은 물론 의령군(宜寧郡) 등 인근 지역 주민까지 가세한 대규모 연합시위로 발전해 13,000명이 넘는 군중이 집결하여 절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3월 21일 거사를 위한 준비는 이원호·전하선·김덕명·구재범(具在範) 등과 함께 진행하였다. 시위에 참여할 군중들에게 나눠줄 태극기를 제작하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으며, 효과적인 군중 동원을 위해 각 지역에 대한 연락을 분담하였다. 거사 당일 주도 인물들과 함께 시위 도구를 나눠서 지참하고 초계시장으로 나아갔다. 오후 1시경, 장터에 사람들이 모이자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준비한 태극기와 독립선언 전단을 나눠주고 선두에서 높은 소리로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뜻을 같이하는 군중들이 결집하여 독립만세를 따라 불렀는데, 시위대 규모는 삽시간에 4,000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를 지휘하여 초계우편소(草溪郵便所)로 진입하여 건물과 기물을 부수고, 통신시설을 절단하였다. 이는 합천경찰서와 일제 헌병대에 연락이 되어 응원 병력이 투입되는 것을 최대한 지연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후 시위대와 함께 초계경찰관주재소(草溪警察官駐在所)로 몰려가서 건물과 유리창을 투석 등으로 파괴하였다. 주재소 일제 경찰들이 시위 진압을 위해 공포탄을 발사하였으나, 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맞섰다. 그러나 합천경찰서로부터 출동한 경찰들이 합세하면서 본격적인 시위 진압이 전개되었다. 진압 경찰들은 만세 군중들을 폭도로 규정하여 총탄을 발사하고, 군중 속으로 난입하여 총검을 휘두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결과 김장배(金長培) 등 2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1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선두에서 시위대를 지휘하며 적극적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경찰의 폭력적 진압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대대적인 주도자 색출 과정에서 이원화·구재범·김덕명 등과 함께 붙잡혔다. 이후 일제 경찰의 가혹한 조사를 거친 후, 기소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8월 8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다가 항소를 취하하였다.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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