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한종
徐漢鍾1867 ~ 1920. 5. 1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2014)
관련 사건
- · 함안군 함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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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14)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함안면(咸安面) 봉성동(鳳城洞) 출신이다. 『3·1운동시피살자명부』에 따르면 1867년생으로 추정된다. 1919년 3월 함안면 읍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붙잡혀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함안면 읍내 시위는 1919년 3월 5일 고종 장례에 참여하고 돌아온 한종순(韓鍾淳)·조한휘(趙漢輝)·이찬영(李讚榮)·박건병(朴鍵秉)·강기수(姜琪秀) 등과 유림이며 한학 훈장이던 안지호(安知鎬) 등이 계획하였다. 이들은 함안면 읍내 장날인 3월 19일을 만세시위 거사일로 정하고, 시위 준비를 위한 역할 분담을 하였다. 이들은 각각 만세시위에 참가한 군중들에게 나눠 줄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제작, 동지 규합과 군중 동원을 위한 연락을 맡고 활동에 나섰다. 1919년 3월 19일 비봉산(飛鳳山)에서 고천제(告天祭)를 지내고, 태평루(太平樓)의 독립선언식을 시작으로 모여 있던 수백 명의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시위 군중과 함께 일제 식민지배의 상징적 기관들인 함안군청·경찰관주재소·우체국 등을 향해 행진하였다. 만세시위가 전개되면서 주위의 사람들이 가세하여 시위대의 규모가 3,000명까지 늘어났다. 만세를 부르면서 평화적으로 행진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군청·주재소 등에 돌을 던지고 군중들과 함께 내부로 들어가 기물을 파손하고 관계자들을 압박하여 시위에 동조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함안군수 민인호(閔麟鎬)는 훗날 재판 증언에서 본인에게 돌을 던졌다고 하였다. 시위대의 규모가 급격히 커지고 군청·주재소 등이 피해를 입자, 일제 경찰은 함안주재소와 지원 출동한 마산경찰서 경찰력만으로는 시위 진압이 어렵다고 보고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의 병력 출동을 요청을 하였다. 저녁 무렵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이 도착하여 군경 합동으로 본격적 시위 진압에 나섰다. 시위대의 기세가 꺾이자 만세시위 주도자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어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는데, 이때 붙잡혔다. 고문을 동반한 조사를 거처 재판에 넘겨졌으며, 1919년 5월 2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8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부산감옥 마산분감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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